조용한 저항, 눈치 보는 나를 이해하는 연습
눈치 보는 나를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읽고, 다들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은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꺼내는 건 언제나 망설임 뒤였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내 생각을 말하는 데에도 ‘허락’을 구하고 있었고, 그 허락은 대부분 ‘괜찮겠지?’라는 눈치였다. 눈치는 단순한 사회적 기술이 아니라, 나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튀는 사람, 까다로운 사람, 민폐 끼치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보이는 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착한 아이로, 무리에서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는 친구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내 감정보다는 타인의 눈빛을 먼저 살폈다. 눈치를 보는 것은 ‘나는 여기 있어도 괜찮은 사람일까’를 끊임없이 묻는 마음의 질문이었고, 나는 그 질문에 단 한 번도 “당연히 그래”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타인의 평가와 분위기에 나를 맡긴 채로 너무 오래 살아왔다. 이제는 그 조용한 저항이 어디서 왔는지, 그 눈치 보는 내가 정말로 바보 같았던 건지 아니면 너무 지혜로웠던 건지, 조금은 다르게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타인의 감정에는 예민하면서 정작 내 감정에는 무감했던 나, 그동안 너무 쉽게 외면당해온 내면의 목소리를 이제야 다시 듣고 싶어졌다. 이 글은 눈치 보며 살아온 나를 이해하고, 비난하지 않으며, 천천히 다가가 다시 손을 잡아주는 연습에 대한 이야기다.
1. 눈치 보는 성격은 나약함이 아니라 오래된 생존 방식이었다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은 종종 부정적인 뉘앙스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유부단하거나 소심하다는 말과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눈치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기질적인 문제나 나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며 살아남아온 사람들의 몸에 배인 생존 기술이며, 타인의 감정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로 인한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무의식의 노력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감정 기복에 따라 상황을 빠르게 읽어야 했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눈치를 배운다. 부모가 화가 나 있으면 조용히 숨죽이고, 기분이 좋을 때만 다가가는 식의 방식으로 정서적 안전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또래 관계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항상 다수의 분위기를 살피며 발언 수위를 조절하거나,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눈치를 챘던 경험 또한 이러한 패턴을 굳게 만든다. 그 결과, 타인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도 마음이 쿵 내려앉고, 일상의 대부분이 ‘지금 괜찮을까?’라는 질문으로 가득 찬 삶이 되어간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결국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는 전략’이자, ‘자신의 존재를 부드럽게 받아들여지게 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나를 드러냈을 때 거절당하거나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까 두려워, 우리는 말 한마디조차 수차례 머릿속에서 돌려보고 조심스럽게 꺼낸다. 누군가에게는 말하는 것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그 한마디조차 감정 조절, 상황 판단, 예측, 정서적 연습까지 거친 끝에야 가능하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눈치 보기란 단지 성격이 소심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진지한 전략이었다. 이러한 눈치 보는 성향은 나약함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와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기제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뎌왔고,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부딪치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또 누군가는 조용히 주변을 관찰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 버텨왔다. 후자의 방식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스스로를 지켜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그 방어가 나를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나에게는 그런 방식밖에 없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눈치를 보는 나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나를 보호해왔는지를 인정해주는 것이 먼저다. 눈치는 겁쟁이의 습관이 아니라, 예민한 감각이 길러낸 오랜 기술이다. 비난이 아니라 이해의 렌즈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 패턴을 놓아줄 수 있다. 이제는 그 방식이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오히려 지금의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천천히 알아차리는 중이다. 관계 안에서 침묵하고 스스로를 억누르는 삶이 익숙하지만, 더 이상 그 익숙함이 안전함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씩 새로운 방식을 배워야 한다. 더 솔직한 감정 표현,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연습, 무엇보다 나 자신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다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세심하게 살아왔다는 증거다. 그 섬세함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 섬세함을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적용할 때다. 내가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는지, 왜 늘 상대의 기분을 먼저 고려했는지를 따뜻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그 시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그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괜찮아. 이제는 너의 감정도 중요해.” 그 말 한마디가, 눈치로 살아왔던 나의 마음을 조금은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2. 타인의 감정에 과하게 반응하는 이유, 내 감정이 무시당해왔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타인의 말투나 표정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 누군가의 찌푸린 얼굴, 평소보다 짧아진 말투, 차가워진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혹시 내가 기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지금 이 분위기를 풀어야 하는 건 내 몫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즉각적으로 마음을 점령한다. 그러면 곧장 자신의 말과 행동을 복기하며, 어느 부분에서 실수를 했는지 찾으려 애쓴다. 이 반응은 단순히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예의라기보다, 내면 깊숙한 두려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정의 구조다. 눈치를 본다는 건 곧 타인의 감정을 내가 조절해야 할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상대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고, 화가 나 있으면 내 탓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 ‘상대를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존재는 빠진다. 바로 나 자신의 감정이다. 타인의 감정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내 안의 감정은 점점 묻히고, 밀리고, 결국은 무시된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 나에게는 어떤 욕구가 있는지를 살펴볼 여유조차 사라져버린다.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중심에 두고 살아온 삶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소외시켜 왔다. 감정은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억눌러야 할 것으로 바뀌었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바를 말하는 대신 상대의 요구를 먼저 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몸에 배었다. 이런 삶의 방식은 나를 ‘좋은 사람’, ‘배려 깊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는 항상 불편하고 외로운 감정이 흐른다. 상대는 편할지 몰라도, 나는 늘 불안하고 조심스러우며, 나중에는 무기력이나 분노로 번지기도 한다. 문제는 이 불편한 감정을 나 자신조차도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내가 예민한가?”, “이 정도는 참아야지”, “괜히 분위기 흐릴 필요는 없잖아”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자신의 감정을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감정을 무시하고 억압한 결과, 나는 결국 내 마음과 멀어지게 된다. 그 감정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 쌓여 고여 있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지거나,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감정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단지 모른 척하는 것이지,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누군가의 감정이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감정은 결국 그 사람의 몫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책임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타인도 나의 감정을 책임질 수 없다. 감정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 감정에도 똑같은 무게를 실어줄 필요가 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 서운함, 조용한 분노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향해 보내는 신호이며, 무시해서는 안 되는 내면의 목소리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했던 만큼, 이제는 내 감정에도 예민해지자. 지금 나는 어떤 기분인지, 어떤 말이 상처가 되었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들어주는 시간을 가져보자.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 수 있다. 내 감정에 귀 기울이는 일이 이기적인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존중이다. 나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감정 표현은 결국 더 건강한 관계로 이어진다. 이제는 나를 소외시키지 말자. 내 감정에도 자격이 있고, 그 자격은 누구의 허락 없이도 유효하다. 나는 느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다. 그 감정에 내가 먼저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 감정을 인정하는 일, 그 작고도 조용한 연습이야말로 내가 나를 다시 존중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3. 내가 말을 삼킬 때마다 무너진 건 관계가 아니라 나였다
우리는 종종 관계를 지키기 위해 말을 삼킨다. ‘이 정도는 참아야지’,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잖아’,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질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불편함을 침묵으로 감싼다. 내 감정 하나쯤은 덮고 넘어가도 괜찮을 거라고, 진심을 조심스레 뒤로 미루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한두 번은 괜찮다고 여겼던 참음이 반복되면, 관계는 어쩌면 겉보기에 아무 일 없는 듯 유지될 수는 있겠지만, 그 안에 있는 ‘나’라는 사람은 조금씩 무너져내린다. 관계의 외형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나라는 존재는 점점 더 투명해지고, 감정은 말라간다. 진짜 문제는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나를 지워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관계가 소중하니까’라는 말로 침묵을 정당화하지만, 그 침묵이 쌓이면 결국은 나 자신을 잃고 만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하지 못한 감정은 내면 깊숙이 가라앉아 쌓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무거운 형태로 마음을 짓누른다. 그렇게 누적된 감정은 언젠가 관계의 균열로 드러난다. 처음에는 사소한 서운함이었지만, 나중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나 피로감으로 변하기도 한다. 눈치를 보며 말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은, 사실은 나에게 ‘넌 중요하지 않아’, ‘넌 지금 말할 자격이 없어’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 말을 가장 많이 들은 건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감정을 말하지 않고 삼키는 습관은 결국 자존감을 갉아먹고, 나는 점점 더 나의 감정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오래되면, 나중에는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고, 내 마음을 설명하는 것조차 막막해진다. 관계를 유지하려던 노력이 결국 나를 외롭게 만들게 되는 아이러니. 그것이 바로 침묵이 만든 그림자다. 관계는 솔직함 위에 설 때 더 단단해진다. 물론, 불편한 말을 꺼내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감정을 표현한 대가가 아니다. 오히려 애초에 그 사람이 내 진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단지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 자리에서 존중하는 선택이다. 말하는 순간은 떨릴 수 있고, 그 이후의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을 견디는 용기보다 더 큰 자유는 없다. 나는 더 이상 침묵으로 관계를 지킬 생각은 없다. 이제는 감정을 말하고도 관계가 이어지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것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선택해야 하는 세상이다. 나의 감정을 내가 먼저 들어주고, 나의 진심을 내가 먼저 인정할 때,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내 말에 당황할 수도 있고, 나의 표현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나를 조심스럽게 드러낸 결과이며, 그 반응이 두려워 내가 또다시 침묵한다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단지 내 마음을 말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정당한 위치로 되돌리는 과정이다. 내가 느낀 감정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내가 경험한 진실이다. 내가 슬펐다면, 그것은 슬픈 것이고, 내가 불편했다면, 그것은 말해야 할 불편함이다. 타인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 방법을 몰랐을 뿐이지, 배울 수 없는 건 아니다. 용기 내어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상대방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과 연결되는 순간부터 진심은 흐르기 시작한다.
진짜 소통은 타인의 말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에 내가 먼저 귀 기울이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 말에 내가 반응하고, 내 감정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과도 건강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침묵은 때로 지혜지만, 반복되는 침묵은 자신을 잃는 길이다. 말할 수 있는 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나로 살아가는 일. 그것이 내가 지금 여기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용기다.
4. 눈치를 보던 내가 표현을 시작할 때 필요한 것들
표현은 단지 말을 꺼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곧 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첫걸음이며, 내 마음의 진실이 삶의 표면으로 올라와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쉬운 일처럼 보일지 몰라도,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에게 표현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용기를 시험받는 일이다. 그래서 눈치를 보던 내가 표현을 시작하려면, 단지 용기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향한 깊은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왜 그토록 말을 아꼈는가, 그 침묵 뒤에는 어떤 감정이 있었으며, 어떤 상처와 두려움이 나를 말없이 만들었는지를 정직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표현하지 못했던 시간에는 수많은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 '거절당할까 봐', '상대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감정적이라고 보이면 어쩌지', '괜히 민폐가 될지도 몰라'라는 생각들은 단순히 예의 바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사람인지, 동시에 얼마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단서들이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사랑을 원했고, 연결을 갈망했다. 그렇기에 표현을 시작하는 일은 곧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안아주는 일과 맞닿아 있다. 처음부터 감정을 유창하게 말해내는 사람은 없다. 표현은 연습이 필요하고, 그 연습은 아주 작고 안전한 공간에서부터 시작해도 된다. 가까운 친구에게, 믿을 수 있는 가족에게, 혹은 말 대신 글로라도 내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에 바로 말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라도 “그땐 속상했어”, “그 상황이 참 불편했어”라고 꺼내는 연습은 분명히 의미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지나간 감정이라도 나의 언어로 회복해내려는 시도다. 표현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지만, 계속 시도할수록 그것은 나의 언어가 되고, 나의 자리가 된다. 표현을 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의 감정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내가 나의 감정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존중할 때, 그 진심은 더 이상 억눌러야 할 것이 아니라 흐를 수 있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 “이 정도 감정쯤은 참아야지”라는 익숙한 방식을 내려놓고, “이 감정도 충분히 말할 수 있어”라고 나에게 말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게 내 감정을 말하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나는 점점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회복하게 된다. 표현은 결코 완벽해야 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어눌해도, 엉뚱한 방식이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심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진심에서 비롯된 표현은 상대의 반응에 상처받기보다, 나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모든 말들이 낯설고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움은 멈춰야 할 이유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신호다. 그 신호에 귀 기울이고 한 걸음 내디딜 때, 비로소 나는 진짜 내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결국 표현은 나다움을 회복하는 통로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감정, 숨겨왔던 진심, 미뤄두었던 말들이 이제는 나를 위한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내 감정에 귀 기울이고, 내 마음에 말 걸며,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 마음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 확인하게 될 것이다.
5. 눈치를 보는 나와 화해하기 위한 마지막 연습
눈치를 보던 나를 바꾸려고 하지 말자. 바꾸려고 애쓰기보다는 먼저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해보자. 그토록 조용히 주위를 살피고, 늘 긴장하며 반응을 조절해온 시간들은 결코 나약함의 결과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간절한 선택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고, 그렇게 살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때의 나는 참 지혜롭고, 참 다정하게 나를 보호해주었다. 다만 이제는 그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더 이상 그 방식이 나를 온전히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을 조용히 알려줘야 할 때가 왔다. 더는 외부의 변화에만 맞추며 사는 삶이 아닌,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땐 정말 수고했어’, ‘너무 고맙다’, ‘네 덕분에 여기까지 잘 왔어.’ 이렇게 말하며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보자. 그 말은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없는, 내가 내게 들려주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회복의 시작이다. 화해는 타인과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와 하는 일이다. 눈치를 보며 살았던 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마음조차도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고, 그 조용한 저항마저도 투명하게 취급당했던 시간이 더 아팠던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 눈치 보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괜찮다고, 이해한다고, 그 마음이 참 애썼다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이해해줘야 한다. 세상의 이해나 인정을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다면, 세상의 이해는 더 이상 절실한 조건이 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이 때로 부담스럽게 느껴지더라도, 내 마음을 먼저 살피는 연습이 쌓이면 그 시선은 더 이상 방향을 잃게 하지 못한다. 자기 안의 불편함을 들어주는 힘, 외부의 기준보다 내 감정에 우선순위를 주는 선택, 그것이 화해의 첫걸음이다. 그 선택을 내가 내게 해주는 것, 그것이 곧 자유에 이르는 문이다. 우리는 단지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왔을 뿐이다. 그것은 옳거나 그르다는 문제 이전에, 어쩌면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그저 이제는 그 익숙한 방식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삶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고,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나에게 더 좋은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이다. 타인의 기분보다 내 감정을, 관계의 유지보다 내 진심의 명확함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삶. 그것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성숙한 삶이다. 조용한 저항 속에 숨겨져 있던 내 진심은 그동안 너무 오래 눌려 있었다. 말하지 못한 것,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 그 모든 침묵 속에는 내가 간절히 전하고 싶었던 나의 진실이 있었고, 그 진실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이제는 그 진심을 꺼내고, 나와 다시 연결되는 그 길 위에 서보자. 눈치 보던 그 아이가 드디어 말을 건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 아이는 약하지 않다. 그 아이는 조심스러웠고, 깊이 느끼는 사람이었으며, 그 섬세함으로 나를 오랫동안 지켜왔다. 그러니 이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자. 더는 억누르지 말고, 더는 눈치 보며 침묵하지 말고, 나의 마음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며 살아가자.
이제는 나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연습이 필요하다
눈치를 본다는 건 결국 타인의 기준에 맞춰 나를 조정하며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정확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에 맞춰 내 감정을 줄이고, 내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는 그렇게 타인의 기분을 살피며 자신을 감추는 법을 익혔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미리 사과하고, 불만이 있어도 침묵하며, 언제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을 조정해가며 살아왔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서는 늘 조용한 저항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말을 삼키고, 나를 사랑받게 하기 위해 진심을 숨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묻자. 나는 왜 그렇게까지 나를 숨겨야 했을까? 왜 나의 감정보다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했을까? 왜 늘 ‘괜찮은 사람’,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써야만 했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가? 눈치를 본다는 건 어쩌면 내가 느끼는 감정이 늘 뒷순위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감정은 한 번도 제때 인정받지 못한 채 내 안에 쌓여만 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방식이 더 이상 나를 지켜주는 방법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나를 지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느낄 때, 그 마음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들어야 한다. 그 감정은 억누르고 넘겨야 할 것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신호다.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 데 익숙한 나였지만, 이제는 내 감정을 먼저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기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존중하고, 내 삶을 진심으로 살아내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태도다. 나는 이제 내가 느끼는 감정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표현하지 못해도 괜찮다. 단지 내가 내 마음을 들어주기만 해도 변화는 시작된다. "지금 네가 불편한 거 알아", "괜찮아, 네 감정도 소중해", 이렇게 나 자신에게 말해주는 일. 그 작은 말 한마디가 내 삶을 달라지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거창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지만, 진짜 변화는 아주 조용한 마음의 응답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감정을 쓰다듬고, 그 감정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침묵의 시간을 넘어서는 진짜 회복이다. 더 이상 조용히 참지 않아도 된다. 더는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불편함을 말해도, 서운함을 표현해도, 속상함을 꺼내도 괜찮다. 이제는 내 마음을 소리 내어 표현하며 살아갈 자격이 있다. 그리고 그 자격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애썼고, 그 애씀 속에는 나를 지키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이제는 생존이 아니라, 회복과 성장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눈치를 보며 나를 감추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며 나는 그 결심의 첫 문장을 조용히 내 안에 새긴다. “이제는, 나의 마음을 먼저 살피며 살아가겠습니다.” 그 문장은 선언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좋고, 다짐처럼 무거울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나를 향해 처음으로 내미는 손길, 내가 나에게 주는 따뜻한 약속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나의 감정을 살아내는 사람으로 자라갈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 눈치를 보던 나와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그게 나답게 사는 길임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