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하루

ohom 2025. 5. 28. 05:53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 하루

조용히, 마음이 흔들리던 순간에

괜찮다는 말이 필요한 날은 꼭 무슨 일이 생긴 날만은 아니었다는 걸, 나는 오늘 다시 알게 되었다. 아무런 사건도 없었고 누구도 내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지쳐 보였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가까운 사람의 말없는 얼굴이 스쳤을 뿐인데, 나는 왠지 모르게 작아졌고, 마음 어딘가에서 삐죽 올라오는 서운함을 느꼈다. 아마도 나는 또 누군가의 눈치를 본 것이다. 그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는지, 내가 뭔가를 실수했는지, 아니면 내가 괜한 오해를 한 건지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눈치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깊은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을. 그것은 관계 속에서 조심스럽게 살아남아야 했던 시간들이 만든 무의식의 언어라는 것을. 나는 왜 이렇게 자주 눈치를 보는 걸까. 누군가 나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애쓰고, 모든 사람의 기분이 나로 인해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 마음은 언제부터 내 안에 뿌리를 내렸던 걸까. 어릴 적부터 나는 그 누구보다도 분위기에 민감한 아이였다. 엄마가 피곤한 날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고, 아빠의 말수가 줄어들면 숨을 죽인 채 TV만 바라보곤 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좋은 아이로 남아 있으면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자라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연인과의 관계 안에서, 직장에서조차 나는 내 마음보다 상대의 감정 상태를 먼저 살폈다. 그렇게 살아남는 법을 익혔고, 그 익숙함이 어느새 내 성격인 것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나는 내가 점점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서 괜찮은 척, 여유로운 척, 이해심 많은 척을 반복하다 보면 나중엔 내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된다. 나 스스로에게 “지금 너는 어떤 기분이니?”라고 묻고도 대답하지 못할 때,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오래 나를 외면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다. 눈치를 본다는 건 단지 예민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게 오래 눌려 있던 상태였고, 거절당할까 봐, 실망시킬까 봐, 나로 인해 누군가가 힘들어질까 봐 내 감정을 포기한 선택의 반복이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나는 혼자 앉아 있는 나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정말 괜찮다고, 지금 느끼는 이 복잡한 마음도, 누군가를 의식하며 불편했던 순간도,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이 말을 듣고 싶었던 사람은, 결국 내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문득 마음이 조금 풀렸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이 조용한 순간이, 어쩌면 내가 나에게 말 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늘 상대의 감정과 반응에 집중하느라 정작 나에게는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던 내가, 지금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괜찮아, 오늘도 잘했어. 조금 부족해도, 완벽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너도 충분히 괜찮아." 이 말을 내가 나에게 건넬 수 있다면, 그 하루는 결코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하루를 살아낸 나에게, 오늘만큼은 꼭 따뜻한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1. 내 감정보다 먼저 살피는 건, 늘 타인의 눈치였다

나는 늘 먼저 살폈다. 누군가의 말보다 그 말의 뉘앙스를, 그 사람의 표정보다 그 안에 숨겨진 마음의 결을,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분위기의 온도를. 말하자면 눈치라는 건 나에게 능력이기보다 생존의 기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누군가의 기분이 상하기 전에 미리 움직이고, 집안의 공기가 무거워지기 전에 내 마음을 숨겼다. 엄마가 피곤해 보일 때는 다가가지 않았고, 아빠가 말없이 앉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은 항상 '두 번째'가 되었다. 내가 슬퍼도 누군가가 불편해하지 않아야 했고, 내가 힘들어도 그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쳤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건 ‘내 진짜 마음’이었다. 살면서 수많은 상황에서 나는 본능처럼 눈치를 봤다. 누군가의 말투가 평소와 조금 다르면 내 탓 같았고, 모임에서 나만 말을 안 걸어오면 내가 뭔가 실수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웃지 않으면 내가 웃기지 않은 사람이라 느꼈고, 대화가 끊기면 내 존재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런 생각은 순식간에 마음을 가라앉혔고, 말끝을 흐리게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나를 그 자리에 있는 ‘조용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게 착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 했지만, 나는 그 말이 버겁고 슬펐다. 나는 사실 착한 사람이기보다, 상처받기 싫은 사람이었고,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외면당하는 게 무서워 눈치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눈치를 보았던 많은 순간들 뒤에는 하나의 감정이 숨어 있었다.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이 단순하지만 절실한 바람은 나를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만들었고, 관계 속에서 나를 숨기는 연습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친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고, 직장에서는 늘 밝은 얼굴로 일했고, 가족 앞에서는 약한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나에게 '진짜 너는 어떤 사람이야?'라는 질문은 늘 낯설고 어려운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내 마음보다 타인의 감정부터 살펴왔기 때문이다. 그게 익숙했고, 그게 나를 덜 다치게 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놓쳤다. 나의 진심, 나의 바람, 나의 감정. 어느 날 문득 내 감정을 물어보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글쎄요, 제가 뭘 느끼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 한마디에 나도 놀랐고, 그 사람도 당황했다. 나는 나를 너무 오래 방치했다. 타인을 향해선 촉이 예민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누군가의 기분은 예민하게 알아채면서도, 내가 지금 왜 불편한지를 묻지 않았고, 내 마음이 어디에서부터 무너졌는지 살피지 않았다. 그게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의 공통된 모습이다. 타인의 감정에는 민감하지만, 내 마음엔 둔감한 사람. 타인을 배려하느라, 정작 나를 지키지 못한 사람.

이제는 그 익숙한 패턴을 조금씩 멈추고 싶다. 타인을 향한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리고 싶다. 그 사람의 표정보다, 내 마음의 떨림에 먼저 집중하고 싶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묻고, 그 감정이 왜 올라오는지 들여다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눈치를 보는 나를 다그치지 않고, 그 마음의 이유를 이해해주는 것부터가 회복의 시작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타인의 말투 하나에 흔들릴 수 있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나의 불안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제보다 나아졌다고 믿는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타인을 먼저 살펴보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내 마음을 뒤늦게라도 읽어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회복이고, 진짜 자존감의 시작이 아닐까.

2. 사랑받기 위해 나는 얼마나 애써야 했을까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사랑 그 자체였을까, 아니면 사랑받기 위한 자격을 얻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을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고, 인정해주고, 곁에 있어주는 것이 너무도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지금도 그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닌, '좋은 아이'로서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 같다. 엄마는 착한 아이를 좋아했고, 선생님은 말을 잘 듣는 아이를 예뻐했으며, 친구들은 웃겨주거나 맞춰주는 아이 곁에 머물렀다.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점점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맞춰갔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용히, 나는 나 자신을 포기해갔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믿음이 점점 단단해졌고, 그 믿음은 나의 무의식에 깊게 새겨졌다. 어떤 관계든 처음에는 나답게 다가갔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은 어떤 걸 원할까’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말투, 웃는 포인트, 기대하는 모습에 나를 맞추려 애쓰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익숙해질수록,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진짜 나는 어디에 있고, 지금 이 관계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 모르겠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나는 진심으로 사랑을 원했지만, 그 사랑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내어주고 있었다. 감정, 시간, 생각, 자존감. 그렇게 무엇이든 줄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누군가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줘도 나는 너무 쉽게 마음을 열었고, 너무 빠르게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대부분 실망으로 돌아왔고, 나는 그때마다 또다시 ‘내가 부족했구나’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사랑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늘 불안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불안, 지금 이 애정이 사라질까 봐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 조금이라도 실망시킬까 봐 나를 더 조심스럽게 만드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나는 기본적으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패러다임이 있었다. 이 마음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 모든 행동을 조종하고 있었다. 상대가 나에게 주는 사랑은 감사하면서도 두려웠고, 내가 바라는 사랑은 당연히 받을 수 없다는 마음이 늘 나를 한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주고, 더 참으며, 더 애써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건 결코 건강한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관계의 왜곡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사랑받기 위해 참 많은 것을 희생했다. 때로는 내 감정을, 때로는 내 경계를, 때로는 내 욕구마저도.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사랑은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심이 아닌, 노력으로 유지한 사랑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사랑은 자격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받아야 하는 것이며,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나를 잃고 있었던 것임을. 그것을 깨달은 이후, 나는 조금씩 나를 되찾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솔직해졌고, 조금 더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너는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야”라고 말해주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이 스스로에 닿는 순간, 나는 아주 오랜만에 진짜 나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나는 묻는다. 지금 이 마음은 사랑받기 위한 몸짓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가. 그 질문 하나가 나의 일상을 바꾼다. 과거의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너무 많이 부정했지만, 지금의 나는 사랑이 나를 아프게 만든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려 한다. 진짜 사랑은 애쓰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관계 안에서, 내가 나답게 있어도 충분히 안전한 관계 안에서 자란다는 걸,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이기 위해 선택하는 사랑을 이제는 조금 더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리고 그 시작은, 타인의 사랑이 아니라 내 안의 사랑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오늘도 나는 그 사실을 조용히 되새긴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한다.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3.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 앞에서 더 작아졌던 나

나는 참 이상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몰라줄수록 오히려 더 작아졌고, 더 잘하려고 애썼다. 마치 나를 몰라주는 것이 나의 부족 때문인 것처럼, 내가 더 따뜻하게 말했더라면, 내가 더 예쁘게 웃었더라면, 내가 뭔가를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 착각은 아주 오래된 무의식의 패턴이었다. 어릴 적, 내가 슬퍼도 아무도 알아채주지 않았던 기억. 속상해서 울고 싶어도 “왜 그렇게 예민하니”라는 말에 눈물을 삼켜야 했던 시간들.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 ‘감정을 표현해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학습을 심어주었고, 그 결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다정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은 늘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점점 더 움츠러들었고, 결국엔 나조차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기대한 것은 거창한 이해가 아니었다. 다만,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내 표정에 반응해주는 아주 사소한 배려였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관심조차 받지 못할 때, 나는 그 순간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만 소외된 듯한 느낌, 대화 중 내 말이 공기처럼 흘러가는 순간, 내 감정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표정들. 그런 시간들을 겪을수록 나는 내 감정을 점점 더 숨기게 되었고, 결국에는 ‘말해도 소용없다’는 무력감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를 몰라주는 사람일수록 더 붙잡고 싶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인정받으면,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것 같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를 이해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정받아야만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왜곡된 신념이, 나를 더 깊은 외로움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관계 안에서 나를 작게 만들었고, 눈치를 보며 무너져갔다. 어느 날, 나의 말이 웃음이 되지 않았던 순간, 나는 혼자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고, 그때의 수치심은 아직도 마음 한켠에 남아 있다. 내 진심을 이야기했는데도 가볍게 넘겨지는 순간, 나는 나의 감정이 하찮게 여겨졌다는 상실감을 느꼈다. 그때마다 나는 ‘말을 하지 말걸’이라고 후회했고, 점점 더 말수가 줄어들었고, 결국 침묵이 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내게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결코 자발적인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건 수없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 앞에서 작아지다 못해 사라져버린 감정의 결과였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맞춰가며 내 감정을 포기했고, 어느새 ‘존재감 없는 사람’이라는 무언의 타이틀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너무 오래 마음을 눌러왔고, 너무 오랫동안 작은 목소리로만 살아왔던 나에게 갑자기 질문이 던져졌다. “너는 진짜 네가 원하는 걸 말한 적이 있어?” 그 물음 앞에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늘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살았고, 나를 몰라주는 사람 앞에서 더 열심히 애써왔을 뿐, 내 마음을 진심으로 들여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연습을 시작했다. 말하고 싶은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는 연습, 불편한 상황에서 내 마음을 보호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감정을 먼저 읽어주는 습관. 지금도 누군가가 내 마음을 몰라주면 여전히 서운하고 작아지는 순간이 있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내가 틀려서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내가 되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대신, 이제는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연습을 더 자주 하고 있다. 내가 오늘 왜 불편했는지, 어떤 말이 나를 움츠리게 했는지, 무엇이 나를 외롭게 했는지를 천천히 적어보며, 나는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 내 감정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은 어쩌면 아주 작고 조용한 변화이지만, 내게는 세상을 다르게 느끼게 하는 커다란 전환점이다. 오늘도 누군가가 내 마음을 몰라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작아지지 않는다. 나는 내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작은 사실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마음에게 말한다. “괜찮아, 네가 느낀 그대로, 그 마음은 틀린 게 아니야.”

4. 이제는 내 표정부터 읽어주고 싶다, 나 자신이

나는 늘 타인의 얼굴을 먼저 살폈다. 상대의 표정이 어두우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했고, 말투가 달라지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얼굴이 굳어 있을 때는 내 말이 불편했을까 혼자 마음을 졸였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 순간에는 나를 싫어하게 된 건 아닐까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다. 그렇게 나는 늘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집중했고, 정작 내 얼굴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진심이 담겨 있었는지, 내가 웃는 얼굴로 대답할 때 마음은 울고 있었는지, 나는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내 표정은 자동화되었고, 내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고, 내 감정은 무대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나는 나를 관객으로부터 철저히 숨겨진 배우처럼 다루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너무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나보다 타인을 먼저 이해하려는 습관은 마치 미덕처럼 자리 잡았고, 나는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내가 눈치가 빠르다고, 감각이 섬세하다고, 다른 사람보다 감정에 민감하다고. 그러나 그건 감각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경계였다. 나는 타인을 잘 안다기보다는 내 감정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내 표정을 내가 모른다는 건,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 산 시간의 결과였다. 누군가 내게 “지금 너는 어떤 감정을 느껴?”라고 물어오면, 나는 늘 멈칫했다. 기쁘다, 슬프다, 화가 난다. 그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았고, 대신 머릿속에서 돌고 도는 건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라는 계산된 반응뿐이었다. 나는 감정을 느끼는 대신 감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사진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사진 속 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공허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빛은 멀어 있었고, 자세는 곧았지만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고도 아팠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불편한 미소를 익숙하게 품게 된 걸까. 그렇게 사진 하나에 눈물이 날 만큼 마음이 흔들릴 줄은 몰랐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나를 몰라준 건 남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나는 매일 타인의 눈치를 보며 나를 조율해왔고, 그 안에서 나의 마음은 조금씩 닫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싶었다. 더 이상 남의 표정보다 내 얼굴을 먼저 살피고, 더 이상 남의 감정보다 내 기분을 먼저 묻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약속을 하나 했다. 매일 거울을 볼 때, 내 표정을 먼저 읽어보자고. 이제는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조용히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너는 어떤 마음이니?” 그 질문 하나로 마음이 일렁일 때가 많다. 내가 오늘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감정을 억눌렀는지, 무엇이 나를 웃게 했고 무엇이 나를 무겁게 했는지 하나씩 떠오른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했지만, 그 연습이 쌓이자 점점 내 감정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의 끝에 눈이 피곤한 이유는 감정을 숨기느라 애쓴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고, 마음이 가라앉는 날은 나조차 나의 감정을 무시하고 지나친 경우가 많았다. 내 표정은 거짓말을 못 했고,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그 신호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더 정직하고, 더 절실했다. 내가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내 표정은 매일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라도 내 얼굴에 먼저 말을 걸기로 한다. 누가 나를 먼저 이해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내 얼굴을 바라보고,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내 마음에 다정하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의 표정을 읽는 건 누군가의 역할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기도 하다. 더는 타인의 반응에 따라 내 감정의 방향을 정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나를 더 자주 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 내 얼굴에 담긴 감정을 알아주다 보면, 언젠가는 그 표정 속에 담긴 진짜 나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나를 지지하고 나를 안아주는 연습이 깊어질수록, 나는 타인의 눈치를 덜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가 내 편이 되어주기로 했으니까. 이제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하니까.

5. 오늘은 그저,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특별히 잘한 일도 없고, 그렇다고 큰 실수도 없었다. 평범한 하루였지만,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무거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조용한 울림이 가슴 안쪽에서 계속 울렸다. 누군가의 표정 하나에 괜히 긴장했고, 예상하지 못한 반응 하나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런 감정은 설명하기 어려워서 더 어렵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속에서는 파도가 치는 날,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늘 그래왔듯, 오늘도 나는 어쩌면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잣대를 들이댔는지도 모르겠다. 이만큼 했으면 됐지, 하고 말해주기보다는, 더 잘했어야 했다는 속삭임이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나무라지 않았지만, 나는 오늘도 스스로를 조용히 혼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그 모든 소리를 잠시 멈추고 싶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한마디, "괜찮아"라고. 이 한마디가 내게는 얼마나 낯설고도 간절한 말인지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괜찮아지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었다. 감정을 조절하고, 실수를 줄이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데 정작 ‘지금 그대로도 괜찮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은 없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건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를 다그치는 데는 익숙했지만, 나를 위로하는 데는 서툴렀다. 나는 내 안의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눈치를 보고 조심스럽게 하루를 버틴 어느 저녁, 나는 거울 속의 나에게 자꾸만 미안해졌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애써 살아낸 나에게, 아무도 토닥이지 않아도 버텨낸 나에게, 오늘만큼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말 대신 마음으로. 이유 대신 존재로. 나는 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조용히 마음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떤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고, 어떤 감정도 마음대로 흘려보내지 못한 채, 늘 누군가의 반응을 예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그저 따뜻한 시선 하나,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너는 아무 잘못 없어”라고 말해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그런 말은 쉽게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그 말을 먼저 하기로 했다. 내게도, 그리고 나 같은 마음을 지닌 누군가에게도. 우리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충분히 잘해왔으며, 무엇보다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덜 흔들릴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 마음은 나를 다시 믿기 시작한다. 오늘은 특별히 잘한 일이 없어도 괜찮다. 말실수를 했더라도 괜찮고, 누군가의 기분을 다 헤아리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기운이 없어서 무표정으로 하루를 보냈더라도 괜찮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더라도 괜찮다. 우리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고, 실수해도 괜찮은 사람이며,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다. 오늘 하루, 나를 위해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쓴 나를, 나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 인정 하나가, 내일의 나를 조금 더 편하게 해줄 것이다.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멀리서 들려오는 위로보다 더 깊숙이 나를 감싸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말해주자. "괜찮아, 오늘도 너 참 잘했어."

눈치를 보던 나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연습

나는 오랫동안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며 살아왔다. 누군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내 감정을 접고 마음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 삶은 때로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더 자주 나를 스스로 지우게 만들었다. 눈치를 본다는 건 누군가의 기분을 살피는 일이 아니라, 내 감정을 뒤로 미루는 일이었다. 내 안의 진심이 무시되고, 내 마음의 흐름이 외면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반응으로만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점점 흐려졌고, 점점 작아졌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나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오래된 습관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타인의 시선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소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했다. 그 사람의 말투보다는 내 마음의 반응을 먼저 살피고, 그 사람의 표정보다는 내 얼굴의 표정을 먼저 들여다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했고, 내 진짜 마음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주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누군가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조건 없이, 해석 없이, 이해받고 싶은 마음 그대로 존재하는 나였다. 그 아이는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다가가자 조심스럽게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눈치를 보며 살아온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지켜내기 위한 애틋한 방식이었고, 누군가의 무심함 속에서도 나를 무너지지 않게 만든 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천천히 배워가고 있다. 나를 위해 살기로, 나를 먼저 안아주기로, 나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순간, 나는 어렴풋이 진짜 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누구보다 단단하고 진실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볼 수 있다. 누군가의 반응에 흔들릴 수 있고, 익숙한 패턴에 다시 빠져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나에게 다정하게 속삭일 것이다. 괜찮아, 그건 네가 오랫동안 살아남기 위해 배운 방법이니까. 이제는 그 방법을 고맙게 놓아줘도 돼. 너는 그저 너이기만 해도 충분하니까. 마음을 돌보는 연습은 늘 나를 다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세상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타인이 아닌 나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시 나를 바라보는 연습. 나는 오늘도 그 연습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눈치를 보던 나를 탓하지 않고, 그 마음을 이해해주며,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연습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매일 한 걸음씩 나를 향해 다가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모르게 '눈치보는 나'를 넘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은 누군가의 입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괜찮아, 오늘 하루도 참 잘해냈어. 내일도 너는 너답게 살아가면 돼.”

🌿 오늘의 확언

“나는 오늘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입니다.
내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따뜻하게 안아줍니다.”


🌙 마무리 멘트

오늘 하루, 누군가의 말보다 나의 마음을 먼저 읽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눈치보던 나에게 ‘왜 그랬어’가 아니라 ‘그럴 수 있어’를 말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치유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연습.
그 다정한 연습이 당신의 오늘을 조용히 감싸 안아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