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내겐 모든 것이 쉽게 온다

ohom 2025. 5. 30. 12:34

내겐 모든 일이 쉽게 온다

그동안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을까

많은 사람들은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을 믿으며 살아왔다. 무엇이든 스스로 애쓰고, 고생하고, 인내해야만 정당하게 가질 수 있다고 배웠고, 그렇게 살아야 도덕적이고 떳떳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일은 당연히 어려워야 가치 있고, 쉽게 풀리는 건 어딘가 문제가 있을 거라 의심했고, 삶은 늘 고통을 통과해야만 빛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규범처럼 작동했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쉬운 건 나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무의식을 품은 채 살아가게 되었다. 기회가 와도 의심했고, 일이 순조롭게 풀리면 불안했고, 심지어 잘되는 자신을 미워하며 다시 힘든 길을 찾아가기도 했다. 쉽게 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오래된 사고는, 언제나 더 무겁고 복잡한 선택만을 고집하게 만들었다. 이런 신념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을 넘어서, 문화와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강화되어 왔다. 우리는 학교에서 성적이 오를수록 칭찬받았고, 야근하는 직장인이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고생 끝에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이상적인 삶의 서사처럼 학습했다. 반면 쉽게 무언가를 이룬 사람에 대해서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거나 "배경이 있겠지"라는 식의 거리 두기를 했고, 그렇게 ‘쉬움’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노력의 가치는 높이고, 흐름의 자연스러움은 외면한 채, 우리는 ‘고생을 많이 한 만큼 인정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애쓰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일이 수월하게 풀릴 때조차 '이건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 건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게 고생이 자격이 되고, 애쓴 시간이 곧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시대를 지나오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들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편해지려 할수록 마음 어딘가에서 죄책감이 피어오른다. 마치 쉬운 선택은 게으름이거나 무책임인 것처럼 느껴지고, 고생하지 않은 성과는 도덕적이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쉬운 삶’을 스스로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삶은 반드시 그렇게 어려워야만 하는 걸까? 우리는 진심으로 노력하는 동시에, 흐름 속에서 부드럽게 펼쳐지는 기쁨도 누릴 수는 없는 걸까? 노력 없이 얻으려는 게 아니라, 더 이상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온 건 아닐까?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삶은, 성과로 뒤덮인 삶이 아니라 과정 안에서도 편안함을 느끼는 삶, 쉬움 속에서도 진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쉬운 길을 가면 안주하게 된다”고. 하지만 정말일까? 삶을 어렵게 살아야만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걸까? 오히려 애쓰는 삶에 길들여진 사람은 마음의 여유와 흐름이 주는 신호를 놓치고, 기회가 와도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다. 애써야만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내 삶이 자연스럽고 가볍게 흘러가도 괜찮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마음공부다. 쉽게 풀리는 일을 불안해하지 않고, 흐름이 열리는 대로 발맞추며, 고생하지 않아도 기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게으름이나 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리듬을 믿는 새로운 선택이다. 쉬운 삶을 허락한다는 것은 단순한 자기암시가 아니라, 스스로를 통과해온 패턴을 내려놓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나를 조율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 속에서 나의 진짜 힘은 힘겨운 증명에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기쁨 속에서 피어난다. 이제 나는 선언한다. 나는 고생을 통해 증명받는 사람이 아니라, 흐름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나는 믿는다. 내겐 모든 일이 쉽게 와도 괜찮다고. 내겐 모든 일이, 쉽게 온다고.

‘쉬워도 괜찮다’는 생각이 낯설었던 이유

쉬운 일을 불안해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 오히려 더 긴장하고, 좋은 일이 생겨도 언젠가 그만큼 나쁜 일이 올 거라고 예감하며 마음을 움켜쥐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어릴 적부터 ‘노력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쉬운 건 금방 사라진다’는 말을 들어온 사람들이다. 삶이란 원래 힘들어야 한다는 인식, 고생 없는 성취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집단 무의식은 사회 곳곳에서 당연한 듯 작동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쉽게 해냈을 때 기쁨보다 불편함을 먼저 느끼곤 한다. "내가 이렇게 쉽게 얻어도 될까?", "노력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 풀리는 건 뭔가 이상해" 같은 생각이 습관처럼 올라오고, 그 마음은 스스로를 탓하거나 결과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런 생각은 단지 겸손이나 신중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래된 패턴, 즉 ‘쉬운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내면의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회는 언제나 고생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고, 노력과 인내를 미화하며, 애쓴 만큼 얻는 것이 정당하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가볍게 흘러오는 일조차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내면의 저항을 갖게 된다. 성공한 사람의 인터뷰를 봐도 '그 사람은 뭔가 특별했겠지'라며 거리 두고, 자기 삶에 비슷한 기회가 와도 '내가 받을 수 있는 게 아닐 거야'라며 스스로 멀어지게 만든다. 쉬움은 늘 의심의 대상이었고, 그 의심은 자격에 대한 불안을 만든다. 자격은 늘 노력의 양, 고생의 무게, 포기하지 않은 시간으로만 계산되는 듯 보이고, 그 공식에 따르면 쉽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미심쩍고 불안한 대상이 된다. 이처럼 우리는 삶이 나에게 선물처럼 주는 기회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근원적인 결핍감을 품고 살아간다. 이 결핍은 때때로 ‘겸손’으로 포장된다. 누가 잘했다고 말하면 “운이 좋았어요”라고 얼른 말하고, 인정받을 자리를 피해버리는 건 타인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내가 이만큼의 것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를 스스로 확신하지 못해서다. 결국 쉬움을 낯설어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무의식적 판단에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삶은 반드시 고통과 교환해야만 무언가를 주는 냉정한 거래가 아니다. 어떤 일은 나의 흐름이 맞아 떨어져서 자연스럽게 풀리고, 어떤 기회는 애쓰지 않았는데도 나에게 온다. 그것은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그 타이밍과 에너지에 자연스럽게 정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뭔가를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는 삶의 신호이기도 하다. 쉬운 일이 나에게 왔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힘은 단순한 긍정의 훈련이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있는 ‘받을 자격 없음’이라는 패러다임을 치유하는 깊은 과정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쉬우면 대충 하게 된다고. 하지만 진실은 반대다. 쉬워야 진심이 오랫동안 머물 수 있고, 흐름이 자연스러울 때 더 깊은 몰입과 창조가 일어난다. 쉬운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익숙하지 않기에 거부하고, 스스로 불편해하며 멀리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고생이 나의 가치였고, 증명이 사랑의 조건이었다면, 이제는 쉬움이 나의 기준이 되고, 흐름이 나를 이끄는 시대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나는 정말 나에게 쉬운 삶을 허락하고 있는가?” “내게 오는 기쁨과 기회, 흐름과 연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대답해야 한다. “그래, 나는 이제 쉬워도 괜찮다. 나에게 오는 흐름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워도, 나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의 그림자

우리는 살아오며 수없이 들어왔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빛을 볼 거라고, 지금 힘든 것은 나중에 좋은 일이 있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이다. 그 말은 분명 때로는 희망을 주었다. 버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누구도 위로하지 않을 때, 그 한 마디가 고통을 잠시 감싸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곱씹어보면,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전제가 숨어 있다. 삶은 반드시 고생을 거쳐야만 낙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아무런 고생 없이 다가오는 기쁨은 정당하지 않다는 무의식.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이 수월하게 풀릴 때조차 어딘가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이렇게 쉽게 누려도 되나?", "이거 나중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감정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각인된 고생 철학, 고통을 가치화한 집단 무의식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있다는 증거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때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감내할 이유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지금 느끼는 기쁨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림자도 함께 드리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기쁨을 잠시 누리다가도 스스로 그걸 걷어차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대로 계속 행복할 리 없어", "지금 좋으면 나중에 더 크게 아플 거야"라는 불안이 마음속 깊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자주 자신을 saboteur, 즉 자기파괴자로 만든다. 좋은 관계가 시작되면 도망치고, 일이 잘 풀리면 망쳐버리고, 새로운 기회가 오면 스스로 물러서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낙은 고생 다음에만 와야 한다'는 무의식의 신념이 지금의 풍요를 견디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생을 전제로 한 낙은, 결국 삶 전체를 기다림으로 채운다. 지금은 참고, 지금은 버티고, 지금은 지나가야 하고… 그래서 정작 지금 여기에 머물 줄 모르는 삶을 만든다. 기쁨은 언젠가 올 거라고 믿으며, 현재의 모든 순간을 미래에 저당 잡힌다. 그 믿음이 주는 안정감 뒤에는, ‘지금 이대로는 괜찮지 않다’는 자기부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믿음은 때로 너무 오래되고 익숙해서, 자신이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마음공부를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단지 ‘신중함’이거나 ‘현실 감각’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그 믿음은 삶이 주는 부드러운 기회들을 자꾸만 놓치게 만들고, 반복적으로 '나는 고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서사를 강화시킨다. 이 믿음의 진짜 무서운 점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자신도 모르게 더 복잡한 길을 택하게 되고,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더 어려운 상황을 끌어들이는 삶의 구조를 반복하게 된다. 이쯤에서 멈추어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왜 자꾸만 고생하는 삶을 반복하고 있는가? 지금도 낙을 기다리며, 고생을 일상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노력과 인내가 때로는 삶에 필요한 요소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반드시 고통스러워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진짜 인내는 기쁨 안에서도 가능하다. 흐름을 타고 살아가면서도 배움은 일어난다. 세상은 더 이상 수고의 양으로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할 때다. 고생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낙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성숙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낙은 반드시 고생 뒤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흐름을 신뢰할 때, 지금 이 자리에도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쉬운 일을 불안 없이 받아들이고, 흐름 안에서 기회를 잡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에게 오는 일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연습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마음의 전환이다. 그것은 삶을 가볍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삶의 중심으로 나를 데려다주는 길일 수 있다. 고생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흐름의 시대다. 우리는 더 이상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삶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삶은 애쓰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삶은 정말 애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노력은 미덕이고, 끈기는 성공의 필수조건이며, 고생은 훌륭한 인생의 값진 대가라는 믿음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를 다그치며 버티고, 또 누군가는 고통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삶은,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데려다주고 있을까? 진짜 삶은 애쓰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일이 풀리고, 기회가 열리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이 방향이 맞는지, 이 사람이 나와 어울리는지, 이 선택이 나에게 평화를 주는지. 그런데 우리는 그 신호를 무시하거나, 혹은 무시당해 왔다. 대신 외부의 기준, 사회의 성공법칙, 부모의 기대, 타인의 시선을 따라 삶을 억지로 몰아세우고 그 안에서 나를 부수어가며 살았다. 그런데 삶은 억지로 굴러가지 않는다. 마음이 아닌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일은 언젠가 엇나가게 되어 있다. 아무리 좋은 조건, 완벽한 타이밍, 똑똑한 전략이 있더라도, 그것이 나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면 결국 마음 어딘가에서는 고장이 난다. 불안이 커지고, 자존감이 흔들리며, 몸이 아프거나 관계가 틀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안다.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음을. 흐르는 삶은 그와 다르다. 무엇인가를 이루려 하되 집착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원하되 조급하지 않으며,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그 이후는 삶에게 맡길 줄 안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 선택한 길은 무겁지 않다. 계획은 있지만 고집은 없고, 방향은 있지만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 흐름을 신뢰한다. 이 믿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삶의 추진력이다. 흔히 흐름에 맡긴다고 하면 포기하거나 무책임한 태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은 반대다. 흐름을 타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삶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두고, 내면의 진동을 잘 읽으며, 무언가 맞지 않는 순간을 직감적으로 감지해낸다. 그런 이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반복하지 않고, 같은 문제에 오래 머물지 않으며, 인생의 물살을 헤엄치듯 유연하게 지나간다. 이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안다. 삶은 나에게 늘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애쓰며 살아야 한다는 믿음은 어쩌면, 내 감각을 닫고 타인의 방식에 끌려가던 시대의 유산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믿음을 내려놓을 때다. 노력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짜 노력은 삶을 흐름 속에 두기 위한 정돈이고, 중심을 잡기 위한 연습일 뿐이다. 우리가 애써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그만큼 통제하고 싶기 때문이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불안하고, 실패할까 봐 두렵고, 남들보다 늦을까 봐 초조하다. 그래서 무리해서 달리고, 억지로 사람을 붙잡고,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들려 애쓴다. 하지만 그런 애씀은 결국 나를 더 멀어지게 한다. 삶의 중심에서, 진짜 나로부터. 이제는 흐름을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요히 나를 듣는 시간, 무엇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지 알아차리는 시간, 억지로 쥔 것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 그런 시간 속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흐름은 나를 가장 자연스러운 곳으로 데려다주며, 그 안에서 나의 재능이 피어나고, 삶이 반짝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흐르는 삶은 느림을 품는다. 그 속도는 남들과 다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나의 리듬이 살아 있다. 그래서 편안하고, 지치지 않으며, 오히려 멀리 간다. 애쓰는 삶은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폭발시키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선언하자. 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고. 나는 흐름을 신뢰하겠다고. 삶은 본래 나에게 호의적이다. 나를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주려 애쓴다. 그러니 흐름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나를 맡겨보자. 애쓰지 않아도,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삶이 먼저 와서 손을 내밀기도 한다는 것을 믿어보자. 그것이 바로, 삶과 내가 하나 되는 가장 평화로운 방식이다.

결과보다 마음의 흐름을 믿는 연습

우리는 결과를 보며 안심한다. 눈에 보이는 숫자, 결과물, 성과가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서 그 과정이 아무리 부정직하고 힘겨워도 결과만 좋다면 괜찮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의 흐름은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국 삶의 모든 방향을 결정짓는다.
많은 사람들은 결과가 없으면 실패라고 단정 짓는다. 시험에 붙지 못하면 헛된 시간, 사업이 성공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도전, 상대가 떠나가면 잘못된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언제나 끝을 확인해야만 마음을 놓는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지금의 흐름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의 감각보다는 결과를 내는 법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흐름을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다. 아직 결과가 오지 않았지만 그 과정이 진실하다고 느껴질 때, 선택에 후회가 없을 때, 마음이 편안할 때, 우리는 이미 그 길을 잘 가고 있는 중이다. 결과는 흐름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일 뿐, 본질은 아니다. 흐름이 맑고 부드러우면, 그 끝은 결국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도달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흐름이 맞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내면의 감각이 무뎌져 있다는 것이다. 불안, 조급함, 비교심, 자책은 마음의 흐름을 왜곡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길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서도 옳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선 결과가 나와도 공허하거나, 오히려 더 불안해지기도 한다. 마음의 흐름을 신뢰하는 연습은 조용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오늘 하루 내가 선택한 말, 행동, 감정의 흐름을 돌아보며 물어보는 것이다. “이건 진심에서 온 걸까?”, “지금 이 방향이 나를 평화롭게 만들고 있나?”, “나를 위한 결정이었나, 타인을 의식한 반응이었나?” 이런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점점 내면의 진실한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결과 중심의 삶은 판단을 요구한다. 성공인지 실패인지, 이득인지 손해인지, 좋았는지 나빴는지. 하지만 흐름 중심의 삶은 경험 자체에 의미를 둔다. 실패를 통해도 성장하고, 손해를 통해도 배운다. 그런 삶에서는 결과가 없어도 의미가 있고,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가장 깊은 차이는 여기에 있다. 결과를 믿는 삶은 언제나 외부를 기준으로 한다. 반면 마음의 흐름을 믿는 삶은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심이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보겠다’는 선언이다. 물론 마음의 흐름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동안은 불확실하고, 다른 이들과 속도가 다르고, 주변에서 결과를 재촉할 수도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붙잡아야 한다. 그들의 리듬이 아닌, 나의 리듬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때로는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고, 계획은 어긋나고, 기대했던 일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내 마음이 후련하고, 후회가 없고, 누군가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살아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성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연습한다. 마음이 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법을, 눈에 보이지 않아도 흐름을 신뢰하는 법을, 결과보다 내면의 평화를 우선하는 삶을.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잘 가고 있어, 이 길이 너의 길이야.” 그때 우리는 웃으며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결과보다 흐름을 믿기로 했어. 그리고 그것이 나를 살리고 있어.”

완벽하지 않아도, 나라는 존재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완벽해야 사랑받는다고 배워왔다. 실수하면 혼나고, 부족하면 무시당하며, 모르면 부끄러워해야 했다. 그래서 잘해야 했다. 인정받으려면, 살아남으려면, 더 열심히 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자신을 몰아붙이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의 우리는 외면은 그럴듯해졌을지 모르지만, 내면은 지치고 다친 채로 버티고 있다. 아무리 성취해도 허전하고, 누가 칭찬해도 믿기지 않고, 조용한 순간에는 여전히 불안하다. 어딘가 아직도 더 나아져야 하고, 더 잘해야만 한다고 믿는 그 완벽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지만 진짜 변화는 그 반대에서 시작된다. 나는 있는 그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믿음, 지금 이 모습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확신, 실수도 나의 일부이며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수용의 자세. 이 모든 것은 완벽주의를 내려놓는 그 순간부터 가능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깊은 평화를 경험한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눈치 보며 말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 있는 나 자신조차 부끄럽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억지로 끌고 가지 않아도 흐름이 열리고, 조급하게 움켜쥐지 않아도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은 ‘잘해서 오는’ 선물이 아니라, ‘진짜 나로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와도 같다. 이제는 결과보다 흐름을, 타인의 기준보다 나의 감각을, 완벽함보다 진실함을 우선하는 삶을 선택해도 괜찮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꾸만 자신을 고치려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괜찮다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당신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완벽하지 않음 속에서도 반짝이는 고유한 빛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 이 한 문장을 마음에 새겨보자.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의 나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