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말하지 못했을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가장 근원적인 욕구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품에 안겨 안도하고, 눈을 마주치며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받는다. 하지만 자라나는 과정에서 그 사랑은 언제나 조건적이었고, 우리가 진심으로 바란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도 괜찮다"는 확인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표정 하나에 긴장하고, 선생님의 말투 하나에 움츠러들며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기분이 나빠도 웃었고, 불편해도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진짜 마음을 감추는 데 익숙해졌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그로 인해 사랑이 멀어질까 두려웠고,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면 상대가 나를 떠날까 봐 침묵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굳어지고,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무의식 속 명령에 따라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말하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 그 이면에는 사랑받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관계를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다시 말할 수 있을지 조심스레 풀어보고자 한다.
1.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감춰버린 진짜 감정들
어릴 적부터 착한 아이, 예의 바른 사람, 눈치 빠른 친구가 되기 위해 우리는 너무도 많은 감정을 포기하며 자라왔다. 말썽을 부리면 사랑을 잃을까 봐, 속상함을 표현하면 부모가 더 힘들어할까 봐, 울면 약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용히 눌러왔다. 처음에는 억지로 참고 견디던 말들이 어느새 습관이 되었고, 그 습관은 점차 내 안의 목소리를 지우기 시작했다. 짜증이 나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속상해도 “아니야”라며 애써 덮어버리는 위로의 말들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특히 여성의 경우, 사회 속에서 요구되는 ‘조신함’과 ‘배려심’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더욱더 말 못 하는 상황에 처하곤 했다. 화를 내면 이기적이고, 싫다고 말하면 까다롭다는 시선에 노출되면서, 스스로 감정을 숨기는 것이 당연한 듯 여겨졌다.
그렇게 내면의 분노와 서운함, 불안과 슬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눌린 채 남아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몸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겉으로는 늘 미소 짓고,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은 점점 지쳐가고 무너져간다.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와 관계를 망치거나,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참아왔던 말들은 상처가 되어 남고,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음처럼 남아 여전히 나를 붙잡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 사랑받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을 얻는 방법이 아니다. 억지로 나를 지우고, 감정을 억제하며 억지 미소를 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진짜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줄 수 있을 때 시작된다. 나의 서툰 감정, 투박한 말투, 때로는 부족한 모습까지 드러냈을 때, 그것마저도 끌어안아주는 사람과의 연결이야말로 우리가 진짜로 바라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지금부터는, 그 말을 할 용기가 나에게 있는가? 말하는 연습은 곧 나를 되찾는 과정이며, 사랑받기 위해 감춘 감정들을 하나하나 되살려 진짜 나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다.
2. 눈치를 보며 지켜낸 관계, 그러나 잃어버린 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그 반대의 선택을 더 자주 하게 된다. 나를 지키는 것보다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내 감정보다 타인의 반응을 먼저 고려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종종 나를 희생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관계가 깨질까 봐, 혹은 상대가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또는 혼자 남겨질까 두려워서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표현해야 할 감정을 억누른다. 친구가 내 마음을 몰라줘도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기고, 가족이 상처가 되는 말을 해도 “괜찮아,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라며 애써 외면한다. 이런 반복은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틈을 더 벌어지게 만든다. 말하지 못하고 쌓인 감정은 처음엔 작은 균열처럼 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관계의 전반을 흔드는 커다란 틈으로 번지기 마련이다. 침묵은 때로 지혜일 수 있지만, 반복되는 침묵은 내면을 갉아먹는 침식이다. 결국 우리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침묵했지만, 그 침묵은 사랑도 나 자신도 지켜주지 못한 채 나를 점점 사라지게 만들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점점 마음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가시처럼 박히고, 결국은 어느 날 갑작스레 터져 나오거나 무기력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덮쳐온다. 건강한 관계란 감정을 억제하면서 억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나누며 서로를 존중하는 데서 자란다. 관계를 지키는 가장 진실한 방법은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그 진심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사람과 연결되는 것이다. 불편한 감정을 말한다고 해서 그 관계가 반드시 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하지 않아 관계의 본질이 무너지고, 그때까지 참고 견뎌온 시간들이 무색해지는 일이 더 많다. 지속된 침묵 속의 관계는 점점 피로감을 안기고,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을 때 비로소 끝을 향해 움직인다. 진짜 관계는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불편한 마음을 솔직히 말해도 괜찮고, 감정을 드러내도 외면당하지 않는 곳이다. 그 안에서는 상처가 생기더라도 회복이 가능하고, 오해가 생기더라도 대화로 풀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의 감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내가 나를 존중할수록 타인도 나를 존중하게 된다. 내 감정을 표현하고,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관계 속에서 자유로워진다.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해 먼저 끊어야 하는 것은 내 감정을 억누르던 그 오래된 습관일지도 모른다.
3. 사랑받기 위한 노력은 왜 불안으로 이어졌을까
사랑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우리가 자라면서 체득한 생존 방식이자, 사회가 요구한 방식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은 성적을 받으면 칭찬을 받고, 말을 잘 들으면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들으며 조건부 사랑을 배우며 자랐다. 그렇게 “잘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우리는 더 잘해야 했고, 더 노력해야 했고,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과제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 끝에는 진정한 만족이나 안정이 아닌, 이상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를 좋아해주겠지’, ‘이만큼 했으면 나를 알아주겠지’라는 기대는 수없이 좌절되었고, 실망은 나도 모르게 나를 더 몰아붙이게 만들었다. 인정받지 못한 원인을 나의 부족함에서 찾게 되고,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쉼 없이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잘해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모든 것을 잃을 것만 같고,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도 속이 뒤집혔다.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지만, 그로 인해 진짜 자신과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왜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가장 중요한 믿음을 갖지 못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받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워왔다. 그 믿음은 우리의 일상 모든 곳에 뿌리처럼 드리워져 있다. 일을 할 때도, 관계를 맺을 때도, 심지어는 혼자 있는 시간조차도 ‘더 나아져야만’,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만’ 마음 놓고 쉴 수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러한 조건부 사랑의 패러다임은 결국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불안의 뿌리가 된다. 말하지 못하는 우리의 내면에도 그 믿음이 숨어 있다. “이 정도는 참아야 사랑받을 수 있어”, “지금 말하면 싫은 사람이 될 거야”, “나의 진심을 말하면 부담스러워할지도 몰라.” 그렇게 감정을 누르고 욕구를 감춘 채,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억누른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억누른 감정은 언젠가 폭발하게 마련이고, 인정받기 위해 버티는 삶은 결국 번아웃으로 이어지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런 곳에 있지 않다. 진짜 사랑은 조건이 없다.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 사랑은 누구에게 인정받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허락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조금 부족해도, 실수해도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내 안에 말해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무너졌던 자존감을 다시 세우고, 나를 온전히 살아가게 만드는 진짜 시작점이다. 그러니 이제는 멈춰 서서 나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왜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기 위해 애써야만 했는가? 나는 무엇을 증명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나 자신에게 사랑받는 것을 허락하고 있는가? 그 물음에 솔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조건 없는 사랑의 자리에 도달하게 된다.
4.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말도 잃는다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마음속에 맴돌다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진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하면 내가 너무 예민해 보일까?', '혹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면 어쩌지?', '상대가 나를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말을 꺼내기 전부터 마음을 가로막는다. 생각은 많은데 말은 점점 줄어들고, 감정은 깊어지는데 표현은 점점 더 미뤄진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조차도 감정을 모른 척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말은 곧 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이다. 말할 수 있다는 건 곧 나를 믿는다는 뜻이고,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존재할 자격이 있다는 내면의 신호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말마저 위축되게 만든다. 내 감정을 꺼내는 것이 무례한 것처럼 느껴지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폐를 끼치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을 선택하고, 그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점점 더 작아지게 만든다. 말하지 못한 채 참고, 또 참고, 그러다 결국 감정이 폭발하거나,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기도 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타인의 감정은 항상 우선순위가 되고, 나의 감정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내가 상처받는 것보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기대와 감정을 기준으로 삼게 되고, 결국은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정작 타인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고, 나의 침묵을 오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결과, 진짜 마음은 닿지 않고 오해만 깊어진다. 관계는 멀어지고, 나는 점점 고립된다. 자기애는 이런 왜곡된 관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우리는 때로 자기애를 이기심이나 자만으로 오해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인식일 뿐이다. 자기애는 타인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건강하게 존재하기 위한 필수적인 바탕이다. 내가 나를 사랑할수록,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당당해진다. 거절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고, 오해가 생겨도 설명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자기애는 결국 나를 세우는 힘이자, 관계를 단단하게 지키는 기둥이 된다. 그러니 말할 수 있는 힘은, 내가 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서 비롯된다. 말이란 감정을 꺼내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를 허락하는 용기다. 나는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말을 들으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말하고, 진짜 마음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타인의 눈치 속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나를 향한 신뢰 속에서 단단하게 설 수 있다면, 우리는 말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 그 연결은 억지스럽거나 불안한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5. 이제는 말해도 괜찮다고, 나에게 허락해보기
말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의 문이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탓하며 살아왔다. '그때 왜 아무 말도 못했을까', '그 말을 하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닐까' 하며, 이미 지나간 순간들을 끊임없이 되짚고 자책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 한 문장을, 마치 가장 믿음직한 친구가 속삭이듯 자신에게 건네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치유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조금은 느슨해지고, 내 마음 안의 작은 나 자신이 조용히 고개를 들게 된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시간이 길었다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일수록 조심스럽고 서툴기 마련이다. 그래서 괜찮다. 아주 작고 단순한 말부터 꺼내도 된다. “지금 이건 조금 불편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이 조금 속상했어요.” 이 짧은 문장들이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반복해서 입에 올리다 보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언젠가는 그 말들이 진심을 담아 삶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마음을 꺼냈을 때, 혹시 누군가가 떠난다면 그 관계는 애초에 나를 온전히 존중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잃는 건 관계가 아니라, 나를 억눌렀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진짜 나를 드러냈을 때 함께할 수 없는 관계라면, 그것은 나를 옥죄던 굴레였던 셈이다. 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괜찮은 안전함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내가 무너질까 봐 말을 삼켰던 그 순간들, 그것이 쌓여 나를 지워왔던 시간들을 이제는 천천히 돌려보자. 말하는 연습은 곧 나를 사랑하는 연습이다.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몰라 머뭇거려도, 그 순간조차도 나를 향한 애정의 표현임을 잊지 말자.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서, 나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데려오는 강력한 회복의 과정이다. 이제는 더 이상 타인의 기대에 맞춰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내가 나의 중심이 되어, 내 마음을 먼저 듣고, 먼저 인정해주는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 사랑받기 위해 참았던 말들, 이제는 그 자리를 ‘나를 사랑하기 위한 말들’로 채워보자. 그것은 때로는 조용한 한숨일 수도 있고, 작게 떨리는 목소리일 수도 있으며, 혹은 글로 꺼내는 진심일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 나에게 도착하는 일이다. 그 마음이 스스로에게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삶과 관계 속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울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성장이다. 말로써 나를 존중하고, 감정으로써 나를 껴안고, 표현을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것. 그 과정은 아주 작고 사적인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삶 전체를 바꾸는 거대한 흐름이 된다. 이제는 용기 내어 말해보자. "나는 괜찮아", "이 말도 해도 돼", "이제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어." 그런 말들이 차곡차곡 쌓일 때,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간다.
말하지 못했던 나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주자
우리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침묵해왔다. 말하지 않으면 관계가 유지될 거라 믿었고, 감정을 꺼내지 않으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침묵은 때로는 나를 지키는 방패였고, 때로는 누군가를 배려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침묵은 점점 내 안의 목소리를 지워버렸고, 내 감정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엔 내 존재를 흔드는 칼날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감정을 꾹 눌러 삼켜야 했는지, 그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얼마나 자주 소리 없이 울부짖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삼킨 말, 터질 듯 올라왔지만 꾹 눌러 담아야 했던 속마음, 그리고 그 감정들을 밤마다 되새기며 애써 잠재워야 했던 수많은 밤들. 그 모든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 길고도 외로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침묵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조용히 참을수록, 세상은 나를 조용한 사람으로만 기억했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수록, 타인의 기준은 점점 더 나의 경계를 넘어 들어왔다. 이제는 그 침묵이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내가 그 침묵 속에 머무를 이유가 없음을 인정해야 할 때다. 말하지 못한 나를 탓하지 말자. 그 시절엔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고, 그 방식 안에서라도 나는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남았다. 그 선택조차도 나는 안아줘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도 된다고, 입을 열어도 안전하다고 나 자신에게 말해줘야 한다. 말해도 괜찮은 세상을 바깥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안에서부터 만들어가자. 타인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고, 내 감정과 생각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연습부터 시작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진심을 외면하지 말고, 그 말을 들을 자격을 가장 먼저 나 자신에게 허락해보자. “나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내 감정도 중요해”, “이제는 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이 말을 반복하며, 조금씩 조금씩 내 안의 중심을 회복해가자. 사랑은 표현될 때 비로소 꽃을 피운다.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억눌러놓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고 무게만 남는다. 진심은 전해질 때 빛나고, 감정은 나눌 때 치유된다. 그 시작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나에게 다정한 말을 걸고, 내 감정을 품어주고, 내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그 순간부터 진짜 사랑은 싹을 틔운다.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참고 견디는 방식에 나를 억매이지 말자. 누군가의 인정이나 보호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내가 나를 지켜주고 내가 나를 인정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며 살아도 좋다고,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받기 위한 자격을 증명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내가 충분히 사랑받을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야 한다. 나는 부족하지 않고, 나는 문제있는 존재가 아니며, 나는 내 삶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의 끝에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그동안 잘 버텼어. 그리고 이제는 괜찮아. 너의 진심을 말해도 좋아. 나는 네 편이야.” 그 다정한 말 한마디가,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기다려온 가장 큰 위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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