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순간, 감정의 진자 끝에 매달린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고, 누군가의 눈치에 내 하루가 흔들린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지치고,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감정이 폭발한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지만 정말 ‘그 사람’ 때문일까?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 말하는 팬들럼은 이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팬들럼은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방향, 타인의 에너지에 내가 휘말리는 구조다. 즉, 내가 반응한 것이지, 사실은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날 회의 자리에서 동료가 당신의 아이디어에 딴지를 걸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의 말은 명확히 당신을 향한 비난처럼 들리고, 당신은 당황하거나 화가 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반박하거나, 마음에 응어리를 품고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것이 바로 팬들럼이다. 상대방이 던진 감정의 파동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결과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진자 끝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 팬들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1. 반응은 빠르지만, 인식은 느리다. 그래서 휘말리기 전에 ‘멈춤’이 필요하다.
우리는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반응해버릴 때가 많다. 누군가의 말투가 차가웠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미묘한 눈빛 하나에 기분이 상해서 하루 종일 우울해질 때가 있다. 반응은 즉각적이지만, 그 반응의 근원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팬들럼의 줄을 놓기 위한 첫 번째 기술은 ‘멈추는 연습’이다. 그 짧은 순간을 붙잡는 힘이, 감정의 진자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는 “넌 왜 그렇게 늦게 연락하니?”라고 말했다. 예전 같으면, 그 말에 서운함이 먼저 올라왔을 것이다. ‘또 나를 몰라주네’, ‘항상 이렇게 나를 비난하듯 말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이어지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내가 자식으로 부족한가?’라는 생각까지. 그래서 급히 변명하거나, 서운함을 억누른 채 해명을 길게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멈출 수 있다면 다르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이 말에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감정의 속도를 늦추면, 나의 반응도 달라진다. “엄마, 나도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어. 엄마도 걱정됐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팬들럼은 더 이상 나를 흔들 수 없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회사에서 팀장이 회의 중에 “이런 건 왜 아직 안 됐죠?”라고 다소 날카롭게 물었을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위축되거나, 억울함에 말이 막히거나, 갑자기 숨이 막힐 수도 있다. 그런 순간, 대부분의 사람은 곧장 변명하거나 표정이 굳는다. 하지만 이 반응은 팬들럼의 줄을 잡아챈 것과 같다.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 순간에도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이 말에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지?”, “정말 나를 공격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냥 일적인 표현일까?”라고 말이다. 그렇게 감정의 본질을 바라보는 연습을 할수록, 타인의 말이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또 하나의 예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발견된다. 친구가 나에게 “넌 요즘 너무 바쁘더라, 연락도 안 되고”라고 말했을 때, 예전 같으면 ‘섭섭하단 말이겠지’, ‘나한테 실망했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고, 괜히 미안한 척하거나 “내가 요즘 진짜 바빴어, 미안해”라고 장황하게 변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응, 나도 그 말 들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나도 네 생각은 하고 있었어.” 이렇게 솔직하고 정직하게 감정을 나누는 순간, 감정의 진자는 잦아들고, 관계도 더욱 깊어진다. 이처럼 ‘멈춤’은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기다림이다. 반응 이전에 질문을 던지는 습관은, 나를 감정의 주체로 세운다. 이 질문은 늘 같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이 감정은 어디서 왔지?”, “지금 당장 반응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즉각적인 반응 없이도 충분히 나를 지킬 수 있다. 팬들럼은 우리가 반응할 때 힘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그 순간, 팬들럼은 서서히 흔들림을 멈춘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중심으로, 나의 본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감정의 순간을 통과하는 이 조용한 기술, 그것이 바로 팬들럼을 멈추는 첫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연습이다.
2. 감정은 전염된다 — 내 감정인지, 남의 감정인지 구별하는 연습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감정을 전염받는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표정이나 기운만으로도 나의 하루가 달라진다. 친구가 SNS에 단답만 남긴 날,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고,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의 실체는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상상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그날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고, 단순히 피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너무 쉽게 ‘내 감정’처럼 착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팬들럼은 조용히 우리의 중심을 흔든다.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감정의 진자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팬들럼은 외부의 감정 흐름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게 만든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 크다. 예를 들어, 남편이 화난 얼굴로 퇴근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 하나에 나는 벌써 기분이 가라앉는다. ‘무슨 일이 있었나?’,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불편한 침묵 속에서 나도 무기력해진다. 이렇듯 상대의 감정 상태에 따라 나의 감정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팬들럼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마치 내 것처럼 깊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이 감정이 진짜 ‘나의 감정’일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느끼는 우울함, 짜증, 불안은 정말 내 안에서 출발한 감정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들인 것일까? 이 분별이 중요하다. 마치 누군가가 내 방에 짐을 들고 들어왔는데, 나는 그걸 무심코 내 짐처럼 들고 나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 감정을 품고 다니면서 ‘내 기분이 왜 이러지?’라고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그건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료가 아침부터 말수가 없고 예민하게 반응하면, 나도 점점 긴장하게 되고, 회의 내내 위축된 기분을 느낀다. 혹시 나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건 아닐까, 내가 뭔가 실수했나, 괜히 주눅이 든다. 그러나 잠시 뒤, 그 동료가 전날 늦게까지 야근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면 허탈해진다. ‘괜히 나 혼자 오해했구나.’ 그제야 알게 된다. 내 감정 같았던 것이 사실은 그의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는 걸. 감정의 전염은 아주 자연스럽고,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 감정을 내 안에 들인 다음, 그것을 ‘소유’하는 건 나의 선택이다.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을 무조건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 감정은 어디서 시작되었지?”, “지금 이 기분은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지?”, “혹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들은 감정의 주도권을 다시 내 손에 쥐게 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정의 소유권을 되찾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기분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팬들럼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때 힘을 얻지만, 내가 인식하고 깨어 있는 순간 힘을 잃는다. 내가 나의 감정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감정의 파도도 나를 휩쓸 수 없다. 감정은 느끼되, 붙잡지 않는 연습. 그것이 바로 팬들럼에서 벗어나는 두 번째 기술이다.
3. 반응은 팬들럼을 키운다 —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바라보는 힘
팬들럼은 반응할수록 더 커진다. 누군가 짜증을 냈을 때 나도 짜증으로 맞서거나 마음속으로 응어리를 품는 순간, 감정의 진자는 더욱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감정은 서로를 자극하고 증폭시키며, 결국 지치고 상처받는 쪽은 나 자신이다. 상대가 던진 부정적인 에너지에 무방비로 반응하는 순간, 나는 팬들럼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의외로 단순하다. 반응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렵지만 가장 강력한 실천이다. 예를 들어보자. 카페에 갔을 때, 바리스타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퉁명스럽게 주문을 받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괜히 나한테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 같고, ‘내가 뭐 잘못했나?’, ‘기분 나쁘게 하네’라는 생각이 올라올 수 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표정이 굳거나, 똑같이 무뚝뚝하게 반응한다. 혹은 마음속으로 분노와 억울함이 자라나기도 한다. 그 순간, 팬들럼은 내 감정을 붙잡고 크게 흔든다. 그러나 그때 이렇게 생각해보자. “저 사람도 오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이 한 마디를 마음속으로 되뇌는 순간, 나는 감정의 진자 바깥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그 사람의 감정을 내 감정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힘. 그것이 팬들럼을 멈추는 진짜 연습이다. 또 다른 예시도 있다. 가족끼리 식사 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예민하게 반응하며 짜증을 내는 경우. 이전 같았으면 그 말투에 바로 상처받아 “왜 또 나한테만 그래?”라며 반발했을지도 모른다.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대화는 더 날카로워지고, 결국 모두가 불편한 저녁이 된다. 하지만 만약 그 순간에 한 템포 멈춰서, “아버지 오늘 무슨 일 있었나? 저런 말투는 평소답지 않은데”라고 생각하면, 내 감정의 온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그저 관찰하고, 받아들이고, 한 발 물러서는 연습. 이것이 감정을 지키는 기술이다. 감정은 파도와 같다.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휘말리지 않는 법은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바로 **‘관찰’**이다. 누군가의 말이나 표정, 분위기에 내 감정이 요동칠 때, 그 감정이 일어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피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단지 '지금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구나', '저 사람의 말에 화가 올라오는 중이구나', '내가 지금 방어적으로 반응하려 하고 있구나'라고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수그러든다. 감정의 흐름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흐름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 위에 서 있게 된다. 이 관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주체적인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는 외부 자극에 끌려가지 않고, 내면의 공간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 공간 안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반응할지, 침묵할지, 웃어넘길지, 그냥 지나칠지. 팬들럼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는다. 그건 자동 반응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찰자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감정도 붙잡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흘려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결국 더 자유롭고 단단한 삶을 살아간다. 회사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상사가 이유 없이 예민하게 구는 날, 그 에너지를 그대로 받아서 기분이 망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민감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감정에 쉽게 감염되는데, 그럴수록 더 필요한 것은 감정 관찰의 훈련이다. 상사의 말투를 듣고 마음이 불편해질 때, 곧바로 ‘나 때문인가?’ 혹은 ‘나한테 왜 저래?’라는 반응을 하기 전에, 이렇게 말해보자. “지금 저 사람도 뭔가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말 한 마디가 내 마음의 중심을 다시 세운다. 감정은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다. 하지만 모든 감정을 반응으로 이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정을 바라보는 그 순간,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된다. 팬들럼은 그 순간 더 이상 나를 끌고 가지 못한다. 감정은 흘러가게 되어 있고, 흘려보내는 법을 알게 된 사람만이 중심을 지킬 수 있다. 관찰은 고요하지만 강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든다. 관찰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4. 흔들릴수록 중심으로 — 나의 자리를 다시 찾아오는 질문들
팬들럼은 내가 중심을 잃었을 때 가장 강하게 작동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 같지만, 마음은 불안하고 예민하며,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쉽게 요동친다면 그것은 외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중심을 잃고 있다는 신호다. 마치 깊은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처럼, 중심을 놓친 감정은 팬들럼이라는 이름의 감정 진자에 잡혀 무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자각하는 것이다. 상황이나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보자. 늘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는데, 그 사람과 있으면 이상하게도 자주 위축된다. 말투가 딱딱하거나 냉정해서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괜히 긴장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행동을 되짚고, 괜한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지치고 힘든 이유는, 그 사람이 특별히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중심을 잃기 때문이다. 중심을 잃은 나는 상대의 감정에 따라 나의 존재감을 조정하고, 반응하며, 맞추느라 스스로를 잃는다. 팬들럼은 바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또 다른 예는 발표나 회의 같은 긴장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이상하게 말문이 막히고,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 이 역시 ‘그 상황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의 ‘나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 순간, 나의 가치를 잊고, 타인의 평가에 모든 기준을 넘겨버리는 순간, 팬들럼은 더욱 세차게 흔들린다. 감정은 격해지고, 생각은 흐려지고, 나는 점점 더 나 아닌 모습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지?”라고. 이 단순한 질문은 마치 나침반처럼 나를 다시 나의 중심으로 데려다준다. 감정이 복잡할수록, 상황이 부담스러울수록, 생각이 꼬일수록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감정은 진짜 나를 위한 감정일까?” 내가 느끼는 불안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신호인지, 아니면 과거의 상처가 재생산되는 자동 반응인지 바라본다. 때로는 그 불안이 ‘거절당하면 어쩌지’, ‘실수하면 비웃음 당하지 않을까’라는 오래된 두려움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감정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떤 나로 존재하고 싶은가?” 이 질문은 나를 행동의 주체로 만든다. 그냥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으로 나를 세운다. 내가 원하는 모습, 지키고 싶은 나다움, 그 방향을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다시 중심에 닻을 내릴 수 있다.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단단한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다시 돌아보는 힘이다. 중심이란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돌아갈 자리를 아는 것이다. 가끔은 이런 경험도 있다. 가족 모임에서 늘 나를 무시하던 친척의 말에 또 다시 기분이 상했지만, 그 자리에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지금 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더 중요해.” 그 순간, 감정이 쓸려가지 않았다. 나는 나를 지키고 있었고, 감정은 지나갔다. 중심은 그렇게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아무도 대신 세워주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오직 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중심을 지키는 일은 고요한 싸움이다. 누구에게 보이지도, 칭찬받지도 않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내면의 질문과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 팬들럼은 여전히 흔들리고, 세상은 여전히 말이 많지만, 나는 내 안의 조용한 중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내가 어떤 감정에 반응하는지, 어떤 말에 상처받는지, 어떤 상황에서 위축되는지를 살펴볼수록 중심은 깊어진다. 나를 몰아가는 모든 에너지 앞에서 단 하나의 질문만 기억하자.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지?” 그리고 매일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삶, 그것이 팬들럼의 힘을 이겨내고 나답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5. 거리를 둔다고 해서 틀어진 것이 아니다 – 회복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
우리는 모든 감정을 감당해야 한다고, 모든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릴 적부터 배운 관계의 미덕은 ‘이해하고, 참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보다 나를 소모하게 만드는 사람이 더 많을 때,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의무로 변한다. 그리고 그 의무 안에서 나의 에너지는 천천히 고갈된다. 모든 감정을 통제하고 감내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선택이 필요하다. 그것은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어, 늘 부정적인 말만 하는 친구가 있다. 처음엔 위로해주고 싶었고, 공감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통화가 끝나면 마음이 무겁고, 나조차도 이유 없는 불안과 우울함에 빠지곤 한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삶을 사랑했던 감각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럴 때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말한다. “요즘은 네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까지 무거워져서,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 이 말은 나의 이기심이 아니라, 나의 회복을 위한 정직한 언어다. 그리고 그런 용기가 진짜 관계를 지킨다. 우리는 가까워야만 좋은 관계라고 믿지만, 오히려 너무 가까운 거리는 서로를 상처 입히기 쉽다. 팬들럼은 가까울수록 더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의 감정이 내 안으로 더 쉽게 들어온다. 그 사람이 화가 나면 나도 무기력해지고, 그 사람이 불안하면 나도 괜히 흔들린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의 중심을 잃고, 감정의 진자에 휘둘리게 된다. 팬들럼은 그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 감정을 타인의 감정으로 오염시킨다. 그래서 거리를 두는 것은 단지 사람과의 거리만이 아니다. 때로는 감정의 거리, 생각의 거리, 기대의 거리까지도 조절해야 한다. 너무 가까워서 상처받고, 너무 끌려가서 지친다면, 지금은 잠시 한 발 뒤로 물러날 시간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하려 애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불편한 상황에서도 웃고, 침묵하고, 괜찮은 척한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감정은 결국 나를 병들게 한다. 관계는 숨 쉴 수 있어야 한다. 늘 마주 보고 있으면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시야가 흐려진다. 잠시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고, 내 마음이 얼마나 피로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 그 시간이 있어야 다시 건강한 시선으로 관계를 바라볼 수 있다. 침묵은 도망이 아니라 사랑이다. 침묵은 단절이 아니라 회복이다. 팬들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창한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를 향한 정직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나는 지금 지치지 않았나?”, “이 감정은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가?”, “이 관계는 지금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 반응하기 전에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 그것이 나를 다시 중심으로 데려다준다. 우리가 타인을 너무 많이 신경 쓸 때, 정작 가장 중요한 ‘나의 감정’은 방치된다. 내 안에서 울리는 감정의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관계 속에서도 나로 남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외롭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내가 나와 함께 있다는 뜻이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친밀함을 만들 수 있다. 늘 함께 있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때로는 그리움이 스며드는 거리도 필요하다. 관계란 조율이고, 그 조율을 위해선 나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말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내 마음에 먼저 물어보자. “지금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 “이 반응은 정말 내가 원하는 방식일까?”,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떤 나로 존재하고 싶은가?”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중심을 찾아간다. 감정의 진자에서 벗어나 나의 자리에 닻을 내릴 때, 비로소 마음은 고요해진다. 거리를 둔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를 회복시키고, 관계를 더 성숙하게 만든다.
감정의 진자에서 벗어나, 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살아가는 일은 곧 관계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연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말과 말 사이, 감정과 감정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흔들린다.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 기분이 무너지고, 타인의 말투 하나에 하루가 뒤틀리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팬들럼이라는 보이지 않는 진자에 이끌려, 수없이 감정의 끝을 오간다. 하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도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그것은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아주 작고 단순한 실천들이다. 다만 그것을 반복하며 나의 감정 근육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 실천은 **‘멈추는 힘’**이다. 반응은 빠르지만 인식은 느리다. 그래서 감정이 올라오기 전, 혹은 올라오는 그 찰나에 잠시 멈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무례한 말 앞에서 곧바로 상처받거나 해명하기보다, 내 감정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팬들럼은 나를 흔들 힘을 잃는다. 이 멈춤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가능성이 들어 있다. 멈출 수 있을 때 우리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반응 대신 창조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감정의 주인 되기’**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쉽게 내 것으로 착각한다. 누군가의 표정, 말투, 기분이 나의 기분을 결정하고, 나도 모르게 그 감정에 감염된다. 하지만 진짜 나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이 감정은 진짜 내 것일까?”, “지금 이 무기력함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라는 질문은 감정의 소유권을 되찾게 해준다. 감정은 전염되지만, 소유는 선택이다. 그 감정을 붙들 것인지 흘려보낼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감정의 주인이 되는 순간, 팬들럼은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한다. 세 번째는 **‘반응 대신 관찰하기’**다. 누군가가 짜증을 낼 때 똑같이 반응하면 감정은 증폭된다. 하지만 그 감정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팬들럼의 외부에 서 있게 된다. “아, 저 사람도 지금 힘든가 보네”, “그 말은 그의 감정이지 나의 본질이 아니야.” 그렇게 감정을 관찰하는 연습을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반응하지 않게 된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깊은 내면의 움직임이다. 네 번째는 **‘중심에 닻을 내리는 질문들’**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지?”, “이 감정은 진짜 나를 위한 감정일까?”,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떤 나로 존재하고 싶은가?” 이런 질문들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를 다시 나의 자리로 데려다준다. 중심을 지킨다는 것은 단단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마다 다시 나를 바라보는 힘이다. 중심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서만 발견된다. 그리고 이 질문들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흔들림에 강해진다. 마지막은 **‘거리를 두는 용기’**다. 모든 감정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불편한 관계에서 잠시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선택이다. 팬들럼은 가까울수록 더 세게 작동한다. 그래서 감정적 거리, 물리적 거리, 생각의 거리까지도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자존감이다. “나는 지금 지쳤다”, “이 관계는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용기, 그 솔직함이야말로 나를 지키는 첫 걸음이다. 이 모든 실천은 거창한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나를 향한 정직한 질문 한 줄에서 시작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떤 나로 남고 싶은가?” 이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삶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관계 속에서도 나로 존재하는 길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자유다. 팬들럼은 언제나 흔들린다. 세상은 여전히 말이 많고, 감정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모든 것에 끌려가지 않는다. 나는 나의 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조용히 나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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