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비교에서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기술

ohom 2025. 5. 19. 08:20

비교에서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기술

우리는 왜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작게 만드는가

누군가는 가족 중 한 사람을 마음속 엄마처럼 여기며 자라났다. 정서적으로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준 존재였고, 그 사람은 삶의 기준이자 위로이기도 했다. 그 따뜻했던 사람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도 늘 안정적이었고, 자녀들 역시 뛰어난 성과를 이뤘다. 성공한 직업, 국제적인 삶, 명문대학 진학까지 이어진 그들의 삶을 볼 때마다, 사람은 어느새 자신의 위치를 조용히 비교하게 되었다. 그것은 의도한 감정도 아니고, 질투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슬픈 감정이었다. 비교의 시작은 때로 감탄이었지만, 끝은 늘 자신을 작게 만드는 마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비교한다. 그 비교는 때로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부정하는 데 사용된다. 자신이 해오던 노력이 의미 없어 보이고, 지금의 삶이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순간. 그때의 비교는 더 잘 살고 싶은 갈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돼’**라는 고정된 믿음을 강화하는 방식이 되곤 한다. 그래서 비교는 자극이 아닌 상처로 남는다. 타인의 삶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삶은 왜 이렇게 매끄럽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처럼 안정된 환경, 뚜렷한 성공, 사회적으로 보장된 자녀의 성장을 이루지 못했을까. 그렇게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해묵은 질문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은 언제나 무력감과 자책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그런데 마음공부를 시작하면서 그 질문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나는 어떤 시간들을 견뎌냈기에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걸까?” 비교는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이지만, 치유는 내 안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 안에 묻혀 있던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을 향한 부러움 속에는 사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진심 어린 바람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열등감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성의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교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자 마음의 반응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갉아먹는 방식이 될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부러움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욕망의 형태이며, 비교는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일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무조건 외면하거나 억누르기보다는, 그 안에서 말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비교에서 자유로워지는 첫 번째 기술이기도 하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삶을 기준 삼지 않고, 내 마음의 기준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를 끊는다는 것은 남과 단절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대신 내 삶을 내 시선으로 바라보는 힘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 글은 그런 연습의 첫 걸음이다. 너무 오래 남의 삶을 부러워하며 자신을 작게 만들었던 사람에게, 다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언어를 건네고자 한다.

1. 비교는 열등감이 아니다, 갈망의 언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보다 나은 무언가를 마주할 때 작아지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이 삶의 수준이든, 자녀의 성취든, 가정의 안정감이든, ‘나는 왜 그만큼 되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은 무의식처럼 올라오곤 한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는다. “나는 부족해. 나는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어.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봐.” 그런 생각은 겉보기엔 반성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반복된 학대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더 잘 살고 싶은 마음’,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나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비교는 단지 열등감의 표현이 아니라, 자기 안의 욕망이 길을 잃은 채 외부를 향해 발화된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삶은 단 한 번도 공정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부터 안정된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능력을 차근차근 펼쳐나가지만, 누군가는 사랑을 갈구하며 관계 안에서 늘 인정받기 위해 버티고 살아야 한다. 부모의 경제력, 정서적 안정, 환경의 유무, 교육의 기회. 이런 모든 요소는 비교라는 감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단순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가진 것이 달랐던 출발선에서 경쟁하듯 비교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무력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더 깊은 자책으로 이어지며, 사람을 점점 침묵하게 만든다. 말도, 감정도, 욕망도 닫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교는 단지 “나보다 잘된 사람”을 보는 불편함이 아니라, “나는 왜 여기서 멈춰버렸을까” 하는 삶에 대한 좌절과 마주하는 고통의 언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그대로 두는 대신, 그것을 욕망의 지도처럼 다시 펼쳐볼 수 있다면 어떨까.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이었는지, 나는 누구의 시선으로 살아왔는지, 나는 무엇을 갈망하면서도 감히 바라지 못했는지를 묻는다면, 비교는 비로소 자기 인식의 문을 열어주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은 타인의 삶을 동경하는 대신, 자기 삶의 욕망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부러움은, “나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선언으로 바뀌게 된다. 비교는 나를 작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나를 일깨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남의 삶을 보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게 된다. 그것이 비교의 감정 안에 숨어 있던 진짜 메시지다. 어떤 사람은 고모의 자녀가 세계적인 대학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움찔했다고 했다. 자녀가 잘된 이야기를 들으면 진심으로 기뻐하고 싶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삶과 아이의 현재를 떠올리며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이 반복되었다. 그것은 고모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고,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고,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던 오랜 바람이 아직도 그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니까 부러움은 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징후였고, 아직도 성장하고 싶고, 나도 그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다는 감정의 흔적이었다. 비교는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던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데려오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비교는 나를 깎아내리는 감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다시 묻는 질문의 형태일 수 있다. 그렇기에 비교를 끊으려고 애쓰기보다, 그 감정 속에 숨은 내 진짜 소망을 들여다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이 쌓이면, 사람은 조금씩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눈은 언제나 외부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길을 찾는다.

2. 우리는 왜 자꾸 주변사람의 삶을 기준으로 삼는가

사람은 종종 가까운 누군가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기준 삼고 살아간다. 그 대상이 꼭 멀리 있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더라도, 늘 곁에서 조용히 바라보던 누군가의 삶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그 대상은 사촌 언니였다. 또래였지만 삶의 결은 완전히 달라 보였고, 그 차이는 나이가 들수록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사촌 언니는 안정된 가정에서 자라나 명문대를 졸업했고, 좋은 배우자와 결혼해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 정서적 안정, 가족 내에서의 인정까지 모두 갖춘 모습이었다. 그 사람은 가족 모임에서 사촌 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무언가 안쪽에서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고, 이유 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곤 했다. 사촌 언니는 언제나 차분했고, 말투는 따뜻했으며, 타인의 기분을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늘 질서 있고 안정감 있어 보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사촌 언니의 삶을 ‘성공’의 기준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비교는 처음엔 부러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은 점점 자신을 부정하는 형태로 굳어졌다.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했을까?”,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나는 왜 저만큼의 결과를 만들지 못했을까?” 그렇게 마음속의 기준은 점점 단단해졌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현재는 초라해졌다. 비교는 결과가 아닌 존재를 흔드는 감정이 되어, 자신에 대한 확신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삶은 결코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사촌 언니가 받은 지지와 환경, 조건은 그 사람에게 없었던 것이 많았다. 어린 시절, 그는 늘 눈치를 봐야 했고, 감정을 억누르는 데 익숙했고, 사랑을 기대하는 대신 버텨야 하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정서적 기반이 다르게 형성된 두 사람을 같은 눈높이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공정한 일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 마음은 그냥 아프다. 충분히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 모든 과정은 무가치하게 느껴지곤 한다. 사촌 언니의 삶이 눈부시게 보일수록, 자신이 견뎌온 시간은 더욱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 깨닫기 시작했다. 사촌 언니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그녀의 삶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깊이 갈망했던 결핍을 그녀가 채워주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부러움이라기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는 마음의 외침이었고, “나는 왜 그럴 수 없었지?”라는 삶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기준이란 것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것이며, 그 기준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촌 언니가 잘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잘 살아오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삶은 비교할 수 없고, 비교되어서도 안 된다. 기준은 타인의 삶에 둘 때마다 나를 더 작게 만든다. 하지만 그 기준을 내 안에서 다시 세운다면,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제 조금씩 그런 기준을 바꾸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내가 얼마나 상처를 감추며 살아왔는지를 기준 삼기 시작했다. 사촌 언니는 그녀의 궤도에서 살아가고 있고, 나는 나만의 궤도에서 충분히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기준을 바꾸는 순간, 비교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3. 내 삶은 실패한 게 아니다, 다른 출발선이었을 뿐이다

사람은 타인의 삶을 부러워할 때,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작게 만든다. 눈앞에 보이는 성공이 커 보이면 커 보일수록, 자신의 걸음은 더디고 뒤처져 보이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 사촌 언니는 그런 존재였다. 또래였지만 삶의 속도와 궤도가 전혀 달라 보였고, 그 차이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뚜렷해졌다. 좋은 배우자, 안정된 직장, 명문대에 진학한 자녀들. 가족 행사에서 종종 마주치는 사촌 언니는 언제나 여유로워 보였고, 그 앞에서 자신은 이유도 없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나중에 천천히 ‘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거야’라고 위로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는 언제나 부족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변명할 거리만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느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삶의 출발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촌 언니는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의 지지와 격려를 받으며 자신의 삶을 조금씩 키워올 수 있었다. 반면 그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가족 환경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부터 생존을 고민하며 감정 대신 현실을 먼저 배워야 했다. 비교의 시작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절대 같을 수 없는 조건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조건의 차이를 잊은 채, 결과만 보고 자신을 평가하곤 한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 “나는 왜 더 잘 살지 못했을까?”, “나는 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까?” 그런 질문은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흔드는 무력감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통해 그 사람은 서서히 다른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실패한 걸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아주 낡은 대답이 먼저 올라왔다. “그래, 넌 부족했어. 너는 늘 느렸고,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제대로 해낸 게 없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나’가 있었다. 그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아니, 너는 실패한 게 아니야. 너는 단지 다른 출발선에서, 너무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하며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말 한마디가 처음엔 낯설었지만, 천천히 마음에 스며들었다. 실패가 아니라, 시간이 더 걸릴 뿐인 여정, 조금 느린 성장이지만 더 깊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촌 언니가 잘된 삶을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 역시 그만큼 깊이 있는 삶을 버텨온 것도 사실이었다. 정서적 공백 속에서도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익혔고, 무너질 듯한 순간에도 다시 일어서는 힘을 키워왔다. 그것은 누구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의 힘이었다. 비교는 항상 결과만 보여주지만, 삶의 본질은 ‘어떤 과정을 지나왔는가’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견뎠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서사다. 자신은 그 고유한 서사를 잊고 살았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서사를 다시 꺼내 읽고, 내가 지나온 삶을 실패가 아니라 ‘살아냈다’는 기록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삶은 정답이 있는 시험지가 아니고,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경주도 아니다. 어떤 삶은 정직하게 견뎌낸 기록일 수도 있고, 어떤 삶은 보이지 않는 사랑을 지켜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비교는 그만두는 게 아니라, 그 비교 속에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마주한 자신의 삶이, 남들과 다른 궤도를 걸어온 ‘하나의 가능성’이자 ‘충분히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복의 시작이고, 비교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4. 비교의 순간, 감정은 어떻게 나를 무너뜨리는가

사람은 비교의 순간마다 가장 먼저 감정을 통해 반응한다. 머리로는 '비교는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무너져버린다. 그것은 너무 빠르고, 너무 익숙하며, 너무 자동적이다. 친구의 말 한마디, 가족의 무심한 칭찬, 예상치 못한 타인의 근황 앞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속에서는 작게 ‘나는 안 돼’라는 소리가 들렸고, 몸은 미세하게 긴장하며 위축되었다. 비교는 논리적 사고보다 먼저 감정의 반사 작용으로 나타나며, 그 감정은 때로 말보다 강력하게 자신을 조종한다. 비교의 핵심에는 늘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은 비교에 휘둘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촌 언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는 내면에서 다양한 감정이 뒤섞이는 걸 느꼈다. 부러움, 수치심, 질투, 무력감, 서운함.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못했다. 그저 미소 지으며 듣고는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괜히 눈물이 났다. 그 감정이 단지 '질투'라는 말로 단순화되기엔 너무 복잡하고 복합적이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감정의 실체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비교는 늘 감정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감정을 숨기려 애쓰는 대신, 오히려 그 감정을 들여다보고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비교의 무게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첫 연습이었다.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루 중 가장 많이 흔들린 순간을 찾아 감정을 글로 적었다. “오늘 사촌 언니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갑자기 마음이 쿵 내려앉았고, 나는 '우리 아이는 왜 저렇지 못할까'라는 생각에 빠졌다. 그 순간 나는 나를 엄청난 속도로 비난했고, 속에서는 '나는 실패한 엄마다'라는 문장이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감정을 적는 일은 단지 풀어내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동안 언어를 잃었던 내면의 진심에 처음으로 귀 기울이는 일이었다. 감정은 외면하면 증폭되지만, 바라보면 정리된다. 그는 매일 그 연습을 하며 감정을 '감정'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자기 확언도 감정을 붙잡는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 감정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마다 그는 되뇌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다.”, “남과 달라도 괜찮다. 나는 나의 궤도를 걷고 있다.”, “지금 이 삶도 하나의 성공이다.” 확언은 처음엔 낯설고 허무하게 느껴졌지만, 반복될수록 그것은 감정의 물살을 잠재우는 닻이 되었다. 감정은 순간이지만, 그 감정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훈련될 수 있다. 그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감정을 받아주는 자신에게 신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오는 조용한 회복의 신호였다. 비교는 감정을 따라 흐르기 쉽지만,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이 쌓이면 비교는 더 이상 '사건'이 아닌 '해석 가능한 반응'이 된다. 그 차이가 사람을 성장시킨다. 감정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삶 전체를 붙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비교의 순간, 감정을 붙잡는 연습은 곧 자기 존재를 붙드는 연습이기도 하다.

5.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의 삶을 기준으로 삼는가

누구나 한 번쯤은 남의 삶을 보며 마음이 흔들린다. 타인의 성취, 타인의 평온, 타인의 안정이 부러움으로 다가올 때, 사람은 그 감정을 자신을 향한 평가로 바꾸곤 한다. “나는 왜 저만큼 안 되지?”, “나는 왜 늘 이 자리에 멈춰 있을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의 기준은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저 사람과 다른가’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삶은 내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기준에 맞춰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곧 자책과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기준이 외부에 고정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잃는다. 사촌 언니는 단단했고, 성공적이었고, 외부적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부러움이자 동시에 자신을 작게 만드는 기준이 되었다. 그는 그런 기준 속에서 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도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거야”라고 평가 절하했다. 기준이 밖에 있으면, 자신의 삶은 늘 '미완성'으로 남는다. 사람은 그 기준을 바꾸지 않는 한 절대 만족할 수 없고,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알게 되었다. 삶의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나 자주 무너졌는가?”보다 “나는 얼마나 자주 다시 일어났는가?”를,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지켜냈는가?”를. 그렇게 질문이 바뀌자 기준도 달라졌다. 사촌 언니는 그녀의 궤도를 잘 걸었고, 자신은 전혀 다른 궤도 위에서 또 하나의 삶을 성실히 버텨내고 있었다. 비교는 기준의 오류에서 시작되지만, 기준이 다시 설정되면 비교는 힘을 잃는다. 기준을 바꾼다는 건 결국 내가 나를 다시 바라보는 방식, 나의 삶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는 이제 남의 삶을 따라가지 않는다. 스스로를 기준 삼는 사람이 되었다. 타인의 삶이 눈부시게 보일 때마다, 내 삶의 그림자를 더 따뜻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자신이 걷는 길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초라하지 않다는 걸, 기준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로 정해지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은 진짜 자신에게 다가간다. 기준이 타인이 아니라 자신일 때, 사람은 비로소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비교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나를 회복하는 일이다

비교는 타인의 성취를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는 본능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설명은 늘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사람의 삶은 숫자나 결과로 단순하게 요약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사촌 언니의 삶을 오랜 시간 부러워하며 자신을 깎아내려 왔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깨닫는다. 그 비교는 그저 상대가 잘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루지 못한 어떤 것을 아직도 마음 깊이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교는 결국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의 결핍을 마주하게 하는 거울이었다. 그리고 그 거울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생겼을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을 다시 품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잊는다. 결과가 미흡하다고 느껴지면, 그 과정마저도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정직한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 결핍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사랑받지 못한 채로도 스스로를 지켜내고, 눈물 섞인 현실 속에서도 웃으며 살아낸 나날들. 그것이야말로 비교할 수 없는 삶의 깊이다. 사촌 언니가 걸어온 길이 단단하고 부드러웠다면, 그 사람은 날이 서고 바람이 세게 부는 길을 걷느라 더디고 고단했을 뿐이다. 그건 결코 실패가 아니라, 더 많은 걸 감당하며 살아온 증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은 삶의 기준을 바꿀 수 있게 된다. 비교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비교를 안 한다는 뜻이 아니다. 비교의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밀어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진심으로 들어보는 것이다. “나는 왜 지금 이 사람을 부러워하고 있지?”, “나는 이 순간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지?”,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을 정직하게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교는 더 이상 나를 망가뜨리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언어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사람은 타인을 기준 삼지 않고, 자기 삶을 기준 삼기 시작한다. 그것이 곧 마음의 회복이며,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첫걸음이다. 이제 그 사람은 더 이상 사촌 언니의 삶을 흠모하거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람으로 머물고 싶지 않다. 그 대신 자신이 걸어온 길, 버텨온 시간, 감정의 깊이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그 모든 것을 삶의 자산으로 삼고 싶다. 타인의 성공 앞에서 움츠러드는 자신을 자책하는 대신, 그 감정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따뜻한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 비교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준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지는 순간, 사람은 마침내 남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