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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감정에도 귀 기울이며, 향기와 그림 속에서 숨 고르듯 나를 바라보는 시간.

삶의 지혜

미움에서 연민으로: 부모를 다시 바라보다

Laonelle 2025. 10. 1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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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린 시절,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에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것은 때로 말 한마디로, 때로 무심한 시선 하나로 다가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세상에는 다정한 부모가 있는가 하면, 감정적으로 단절된 부모도 있다. 그리고 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며, 어른이 되어도 그 결핍의 기억을 쉽게 놓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그 상처를 미움으로 돌리고, 어떤 사람은 평생 외면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문득 묻게 된다. “그 사람도, 어쩌면 사랑받는 법을 몰랐던 건 아닐까?”라고. 사랑 없는 부모는 자격이 없다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는 당연히 아이를 사랑해야 하고,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본능보다 상처로 살아간다.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그대로 되물림하며, 의식하지 못한 채 반복한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차갑게, 어떤 부모는 무심하게, 또 어떤 부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식을 밀어낸다. 그 안에는 ‘사랑하지 않음’보다 ‘사랑할 수 없음’의 비극이 숨어 있다.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은, 이미 사랑이 모자란 사람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마음은 조금 달라진다. 그토록 미웠던 존재가 갑자기 작고 외로워 보인다. 나를 다치게 한 그 사람도 사실은 자신조차 위로하지 못한 채 살아온 인간이었음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어떤 화려한 깨우침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도달할 수 있는 조용한 인식이다. 미움은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그 자리에 연민이 함께 앉는다. 그리고 그 연민은 우리를 조금 더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미움에서 연민으로: 부모를 다시 바라보다

1. 부모도 누군가의 아이였다

우리가 부모를 미워할 때, 종종 잊는 사실이 있다. 그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자식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부모도 언젠가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의 외로움과 결핍이 아직 그들의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들도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사랑을 충분히 받아본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주는 법을 안다. 그러나 받지 못한 사람은 그 언어를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아이가 남아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서툴고, 종종 모진 말이나 냉정한 태도로 그 결핍을 감춘다. 사람은 경험한 만큼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의 결과다. 아무리 사랑을 주고 싶어도, 자신이 사랑의 언어를 배운 적이 없다면 그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침묵으로, 어떤 부모는 통제와 간섭으로, 또 어떤 부모는 물질적인 보상으로 사랑을 대신한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아이를 대했을 뿐인데, 그 방식은 종종 아이에게는 상처로 남는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두려움과 결핍이 섞여 있을 때, 그것은 보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의 표현일 때가 많다. 아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고, 그저 “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았을까”라는 질문만 남긴다. 이해는 쉽지 않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단순히 시간이 흘렀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그때의 감정을 재현하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무관심에 과하게 반응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마음이 무너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관계에서 보상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멈춰 서서 묻게 된다. 왜 그들은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왜 사랑을 주지 못했을까?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 답을 찾게 된다. “그들도 자신이 배운 방식으로밖에 살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일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가진 한계를 바라보는 일이다. 부모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며, 완벽한 사랑을 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초점을 바꾸면 미움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된다. 내가 부모를 통해 배운 것은 상처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들의 부족함 덕분에 나는 사랑을 더 갈망했고, 그 갈망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을. 이해는 미움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미움의 근원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것은 용서보다 먼저 오는 깊은 자각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연민이다. 부모를 향한 분노가 연민으로 바뀌는 순간, 세상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식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부모도 누군가의 아이였다. 그들도 사랑받고 싶었고,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 평생 그 그늘을 짊어진 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미움에서 벗어나 조금은 더 따뜻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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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움은 마음의 응어리로 남는다

사랑받지 못한 기억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현재의 감정 속에서 살아 숨 쉬며 우리의 반응과 선택을 지배한다. 누군가의 말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사소한 무시에 깊이 상처받는 이유는 바로 그 안에 ‘어린 시절의 나’가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고,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며, 누군가의 품 안에서 안전하게 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된 우리는 그런 감정을 부끄럽게 여기며 애써 외면한다. 그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 미움이 쌓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단단한 응어리로 변한다. 부모를 향한 미움은 사실 부모 그 자체에 대한 미움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슬픔이다. 부모가 나를 외면했던 그 순간, 나는 동시에 나 자신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일지도 몰라.” 이런 무의식적 결론은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그 이후의 삶에 조용하지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 애쓰지만, 스스로는 여전히 자신을 의심한다. 타인의 인정에 흔들리고, 관계 속에서 불안해하며, 결국 반복되는 상처의 패턴 속에 갇힌다. 이 응어리는 무시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회피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우리 안에서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완전히 마음을 닫은 채 살아간다. 혹은 감정적으로 냉담해지거나, 반대로 쉽게 분노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겉으로는 성숙한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그때의 아이가 울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치유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 응어리를 직면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자신 안의 미움을 인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픈 감정을 피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이제는 다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감정은 이성의 설득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인정받지 못한 슬픔, 이해받지 못한 외로움은 언제든 현재의 관계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든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지만, 사실 그 감정의 근원은 내 안에 있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다.” 이 한 문장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응어리를 풀어내는 첫 걸음이다. 미움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사랑의 잔재가 있다. 완전히 사랑이 사라졌다면, 미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미움은 뒤집어진 사랑이고, 다치고 왜곡된 형태의 애정이다. 그래서 그 감정을 직면할 용기를 낼 때, 마음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간다. “나는 미워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이 모순을 인정하는 순간, 미움은 조금씩 힘을 잃고, 마음의 결은 부드러워진다. 그 감정을 마주할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토록 미워했던 대상이 결국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의 나는 여전히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아이가 받아야 할 따뜻한 말 한마디를 나는 아직 건네지 못했다. 그래서 미움은 그 아이의 외침이자, 나 자신에게 보내는 오래된 신호였다. 이제 그 신호를 듣고 응답할 때가 된 것이다. “괜찮아,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그 말을 나 자신에게 건네는 순간, 응어리 같던 미움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오랫동안 얼어 있던 마음이 다시 숨을 쉰다. 결국 미움은 지워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감정이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존재로 서게 된다. 사랑받지 못한 기억이 여전히 나를 흔든다면,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사랑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미움은 응어리에서 빛으로 변한다.

3. 연민은 용서보다 먼저 오는 감정이다

많은 이들이 용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연민을 거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 용서는 이성으로 내리는 결론이 아니라, 마음이 부드러워질 때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부드러움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 즉 연민에서 비롯된다. 연민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 이해는 판단이 아닌 통찰에서 나온다. 누군가를 미워하다가도, 그 사람의 두려움과 상처를 떠올리는 순간, 마음은 조용히 물러선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된다. “그들도 인간이었구나.” 이 짧은 깨달음이 오랜 원망의 벽을 허무는 열쇠가 된다. 우리가 미움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그 감정의 중심에 ‘정의’라는 이름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잘못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 그들이 내게 준 고통을 인정받아야만 내 마음이 풀릴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평생 자신이 준 상처를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다치게 한다.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연민이 찾아온다. 연민은 ‘괜찮다’고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들은 다만 자신이 배운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냈을 뿐이다. 연민이 생기면 마음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미움의 중심에 있던 나 자신이,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그 관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때 마음속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 “나도 상처받았지만, 그들도 아팠을 것이다.” 그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감정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진다. 연민은 미움을 지워버리는 감정이 아니라, 미움을 녹이는 감정이다. 그것은 폭력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부드럽게 순환시키는 일이다. 용서는 누군가를 위해 베푸는 도덕적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위한 해방의 과정이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더 이상 과거의 사건에 묶여 있지 않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그 선언은 연민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의 한계를 보지 못한 채 하는 용서는 억지로 감정을 덮는 것에 불과하다. 진심으로 용서가 가능해지는 순간은, 그 사람의 내면에 있던 공허와 두려움을 바라보았을 때다. “그 사람도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구나.” 이 생각이 스며드는 순간, 우리는 그를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연민은 상대를 위한 감정이 아니라, 나를 위한 자유다. 미움은 나를 과거에 묶어두지만, 연민은 나를 현재로 돌려놓는다. 그 힘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연민이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더 이상 과거의 인물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때부터 내 감정의 주인은 다시 나 자신이 된다. 연민은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와 성숙이 만나 만들어내는 강한 온기다. 많은 사람들은 연민을 착각한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말 속에는 우월감이 섞여 있다. 하지만 진짜 연민은 그 사람의 고통을 나의 한 부분처럼 느끼는 일이다. 인간의 고통은 각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닮아 있다. 나의 외로움이 그들의 외로움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마음은 경계를 잃는다. 그 경계가 허물어질 때, 우리는 미움에서 이해로, 이해에서 사랑으로 천천히 옮겨간다. 연민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의 변화다. 우리가 타인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결국 나 자신의 상처도 함께 치유된다. 연민은 마음의 연금술이다. 고통을 온기로, 분노를 이해로, 상처를 지혜로 바꾸는 힘이다. 그래서 연민은 용서보다 먼저 와야 한다. 용서는 결론이고, 연민은 그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다. 마음이 먼저 부드러워지지 않으면, 용서의 말은 입술에만 머문다. 결국 연민이란, 인간의 불완전함을 온전히 수용하는 용기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렇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진다.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비로소 용서가 가능해진다.

4. 이해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를 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더 이상 그 기억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진정한 이해는 망각이 아니라 직면에서 시작된다. 아프고 불편한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이제 다 괜찮다”고 말하며 기억을 덮으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때의 장면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그 상처를 마주하는 용기가 없으면, 이해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과거를 부정한 채 도달한 이해는 모래 위의 성과 같다. 겉보기엔 괜찮아 보여도, 작은 자극에도 쉽게 무너진다. 진짜 이해는 과거의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의 나를 있는 그대로 품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때의 나는 아팠고, 외로웠고,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마음이 현실 위에 선다. 이해란 “그들이 괜찮았다”가 아니라 “그때의 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다. 부모의 부족함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이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말이나 행동이 내게 상처가 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 또한 자신이 가진 수준과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그러나 그 최선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이런 모순 속에서 존재한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아프게 하고, 지키려다 더 다치게 만든다. 그 모순을 이해한다는 건,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삶의 복잡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기억은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같은 기억이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그 의미는 완전히 바뀐다. 과거의 상처를 생각할 때, 예전에는 분노가 먼저 올라왔다면 이제는 그때의 자신에게 위로가 먼저 간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잘 버텼어.” 이런 말이 마음속에서 떠오를 때, 그 기억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는 힘을 잃는다. 이해란 결국 해석의 변화다. 내가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기억은 고통의 증거가 될 수도 있고, 성장의 흔적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화해를 관계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화해는 이해의 출발점에서 비롯된다. 용서와 화해는 어떤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다. 상대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내 안의 억눌린 감정이 풀리기 시작하고,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매듭이 하나씩 느슨해진다. 그 순간 비로소 관계의 에너지가 순환한다. 과거의 사건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내 마음을 지배하던 힘은 사라진다. 이해가 일어나면, 삶의 에너지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동안 과거에 묶여 있던 힘이 풀리며, 그 에너지는 앞으로 나아갈 용기로 바뀐다. 이해는 화해의 마지막이 아니라, 치유의 시작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를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미워하느라 소비해온 나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 에너지가 돌아올 때 우리는 더 이상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그저 인간으로 선다. 이해는 관계의 균형을 되찾는 과정이자, 내 안의 평화를 회복하는 첫 걸음이다. 그 평화는 상대의 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 시선의 변화를 통해 얻어진다. 과거의 기억을 잊으려 애쓰는 대신, 그 기억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때 비로소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기억은 지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지도와 같다. 그 지도를 부정하면 길을 잃지만, 그 길을 따라가며 배운 의미를 되새길 때 우리는 더 깊은 성숙에 이른다. 결국 이해란 과거를 덮는 일이 아니라, 과거 위에 새로운 나를 세우는 일이다. 이해는 기억의 소멸이 아니라, 기억과의 화해다. 그 화해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과거의 나를 품고, 현재의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마음이 통합될 때, 비로소 치유는 완성된다.

5. 결국, 나를 위한 이해

부모를 이해하는 일은 부모를 위한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회복의 과정이다. 우리는 종종 용서란 상대를 위해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정한 용서는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미움을 품은 마음은 늘 긴장 속에 머물러 있고, 그 긴장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마음속에 억눌린 분노와 원망이 있을 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온전히 기뻐하기 어렵다. 감정의 무게가 행복의 문턱을 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는 그 마음의 문을 연다. 이해는 과거를 바꾸지 않지만, 과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바꾼다. 그 변화는 아주 조용히 일어나지만, 삶의 방향 전체를 바꿀 만큼 강력하다. 이해는 단순히 상대를 변명해 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세계를 정리하는 일이다. 나는 왜 그 사람에게 그렇게 아팠는지, 왜 그 일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이다. 그 질문에 솔직해질 때 비로소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미움의 중심에는 언제나 ‘정의’가 자리한다. 그러나 이해의 중심에는 ‘평화’가 있다. 정의는 옳고 그름을 가르려 하지만, 평화는 단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더 이상 나를 소모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해가 시작되면 마음의 공간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한 사람의 행동에 매달려 내 감정이 흔들렸다면, 이제는 그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 거리를 두는 힘이 바로 자유다. 이해는 단절이 아니라 거리를 허락하는 일이다. 거리를 두는 순간, 관계는 오히려 더 명확해지고, 그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이해는 경계의 회복이다. 경계가 회복되면, 사랑도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부모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나 또한 인간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렇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랑을 배우며 살아간다. 그 부족함을 인정할 때 마음은 유연해진다. 그리고 그 유연함 속에서 비로소 ‘성숙’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갖는다. 성숙이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품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결국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미움과 이해의 경계에는 ‘연결’이라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 너머에는 평화가 기다린다. 이해는 관계의 회복이자, 동시에 자기 회복이다. 부모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모든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누군가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그 사람이 품은 두려움과 외로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시선이 넓어질 때, 세상은 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다가온다. 결국 이해란 나에게 돌아오는 길이다. 내가 품었던 미움, 억눌렀던 감정, 표현하지 못했던 슬픔을 스스로 끌어안는 일이다. 이해를 통해 우리는 다시 자신을 믿고, 자신을 돌보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의 나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온전함을 되찾는다. 이해의 끝에는 감사가 있다. 미워했던 기억조차 나를 성장시킨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삶은 완전히 다른 빛을 띤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이해는 결국, 나를 위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는 것을.

결론 : 미움 너머에 있는 인간의 따뜻함

사랑받지 못한 부모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살아왔지만, 상처의 본질은 그리 다르지 않다. 누구나 사랑을 갈망하며, 사랑받고 싶어 하며, 그 갈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려 한다. 어떤 이는 침묵으로, 어떤 이는 분노로, 또 어떤 이는 무심함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들의 행동이 때로는 타인에게 상처가 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두려움이 숨어 있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사랑을 향한 움직임이거나,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 몸부림이다. 이 단순한 진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미움을 조금씩 내려놓게 된다. 완벽한 사랑도, 완벽한 관계도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성장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부모는 자식을 키우면서 자신이 배우지 못한 사랑을 다시 배우고, 자식은 부모를 미워하면서도 그 미움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다. 상처와 사랑은 그렇게 얽혀 있다. 다만 우리가 조금 더 의식적으로 살아갈 때, 그 반복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과거를 탓하는 대신 그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미움을 붙잡는 대신 연민으로 전환할 때, 관계는 비로소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인생의 가장 큰 공부는, 미워했던 사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움 속에서 사랑의 씨앗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따뜻한 사람이 된다. 미움을 완전히 없애려는 노력보다, 그 미움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흔적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 그 깨달음은 단순히 감정의 변화를 넘어, 존재의 인식 자체를 바꾼다. 사랑이란 결국, 이해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부모가 주지 못한 사랑을 탓하던 마음이 이제는 연민으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이미 성장의 증거다.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는 과정은 오래 걸리지만, 그 여정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성숙해지는 길이다. 사랑하지 못한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통해 타인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이해는 나를 조금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제는 안다. 사랑이 없던 그 시절에도,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외면으로, 또 누군가는 끝내 표현하지 못한 마음으로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비록 그 사랑이 서툴고 모자랐더라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진심이 있었다. 그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피해자가 아니라,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된다. 미움의 끝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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