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서툴지 않았다.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작고 여린 손을 붙잡은 순간부터, 그 아이의 필요는 곧 자신의 전부가 되었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은 결코 두렵지 않았다. 그 모든 선택은 본능이자 책임이었으며, 동시에 어쩌면 그녀가 평생 갈망해왔던 ‘사랑의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그녀는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분주했고, 뭔가를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청소, 설거지, 다리 두들겨주기 같은 일들은 매일의 일과였지만, 정작 그녀의 감정은 어느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고 자란 세월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미루고 타인의 기분을 먼저 살피게 만들었다. 어린 그녀는 너무 일찍, '사랑은 조용히 하는 것', '나는 늘 뒷순위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자란 그녀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스스로를 줄이며 누군가를 사랑했다. 참고, 양보하고, 조율하면서 자신보다 상대의 감정을 먼저 고려했다. 사랑은 견디는 것, 포기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그녀를 점점 더 '비극의 주인공'처럼 살아가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조차 외롭고,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받을까봐 입을 닫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나도 사랑받고 싶다"는 간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만큼은 자신이 겪었던 외로움과 결핍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부족함이 많아도 어떻게든 다 해주려 했고, 때로는 가진 것보다 더 큰 사랑을 주려 했다. 경제적으로 빠듯한 상황에서도, 마음만큼은 언제나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릴 적 받지 못한 사랑의 반대편에서,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멈추어 섰다.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전 잊고 지낸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 그 목소리는 작지만 분명했고, 그 말에 눈물이 났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평생 사랑을 주며 살아왔지만, 정작 받아본 적은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조차 몰랐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누군가의 감정을 먼저 돌보기보다, 자신의 감정에 먼저 귀 기울이겠다고. 수고한 나를 안아주고, 억눌린 나를 다정히 바라보며, 이제는 나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이것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참고 견뎠던 모든 시간에 대한 작별이자, _“이제는 내가 나를 사랑할 차례”_라는 삶을 향한 선언이었다.
사랑은 늘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
그녀는 언제부턴가 사랑을 ‘눈치를 잘 보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말투 하나에 하루의 기분이 좌우됐고, 엄마가 피곤한 날이면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야 했다. 아빠의 표정이 굳으면 입을 닫아야 했고, 동생이 짜증을 내면 양보해야 했다. 사랑은 표현하거나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비껴 서야 얻을 수 있는, 마치 허락을 구해야만 받을 수 있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녀의 사랑의 공식은 ‘참을수록 가까워지고, 눈치를 볼수록 상처받지 않는다’는 구조 속에서 자리 잡아갔다. 마음을 드러내면 싫어할까봐, 기대하면 거절당할까봐, 늘 조심스럽게 주변을 맴돌며 사랑의 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녀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겉으로는 무던해 보이고, 감정 조절이 잘 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늘 자신의 마음을 뒤로 미룬 채 상대를 먼저 고려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도, 기쁨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혹시 나의 마음이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너무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그녀는 늘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마음을 열기도 전에 스스로 그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바라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대할 때는 그 따뜻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건 너무 낯선 감정이었고, 한 번도 안전하게 느껴본 적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관계에서 늘 ‘주는 사람’이 되었다. 먼저 표현하고, 배려하고, 상대가 편하길 바라며 자신의 필요를 뒤로 미뤘다. 사랑은 내가 얼마나 참고 견디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믿음은 자신도 모르게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삶의 각본을 쓰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누구보다 혼자 견디고, 누구보다 쉽게 상처받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깊을수록 그녀는 더욱 자신을 숨겼고, 자신의 감정은 더 멀리 밀려났다. 상대방이 떠날까 두려워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고, 불편함을 줄까 봐 자기 욕구를 감췄으며,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 채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삶의 패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단단하게 굳었다. 직장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녀는 늘 상황을 조율하고, 감정을 절제하고, 상대가 원하는 타이밍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고, 모두가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 말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아무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다고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하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면 사랑이 멀어질 거라는 믿음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생존 방식이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조심스러웠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양보했고,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바로 ‘진짜 나 자신’이었다.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잘해줘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갈망하며 눈치를 보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지금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이 구조를 알아차린 것은, 그녀가 진짜 회복을 시작하게 된 첫 번째 걸음이었다. 더 이상 사랑은 조심스럽게 얻어야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도 되는 것이라는 진실을, 그녀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왜 더 많이 주려 할까
사람은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갈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갈망은 때때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어릴 적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부모로서 혹은 연인으로서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주는 사랑’에 몰두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정답인 양, 사랑은 내가 애써서 만들어내야만 존재하는 것이라 믿고, 상대가 채워주지 않아도 된다는 각오로 스스로를 움직인다. 그녀 역시 그랬다. 사랑이 고팠던 어린 시절을 지나,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짐했다. “나는 절대 내 아이를 외롭게 두지 않겠어. 내가 받지 못한 사랑, 다 쏟아줄 거야.” 그렇게 그녀는 매 순간을 헌신했고, 가진 것을 넘어서 없는 것도 만들어가며 사랑을 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문제는, 그렇게 ‘주는 사랑’에 몰입할수록 자신은 점점 더 바닥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은 수없이 양보했고, 가족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은 늘 뒷전으로 미뤄두었다. 어느 날은 돈이 부족했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서, 카드 값을 감당하기 어려움을 알면서도 빚을 내며 마음을 채우려 애썼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누구보다 깊은 외로움과 보상받지 못한 마음이 조용히 숨어 있었다. 그녀는 늘 누군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은 덜 자고 덜 쉬고 덜 누리면서도 그 사실을 자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사랑은 ‘내가 어떻게든 채워줘야 하는 것’이었지, 누군가로부터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정하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나는 이렇게까지 해야 사랑받을 수 있어'라는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사랑을 주고 있음에도 외롭다고 느끼고, 감사의 말을 들어도 마음이 허전하다고 말한다. 그녀 역시 그러했다.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것을 보며 감동했고, 매일의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가끔은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기댈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까?” 사랑을 주는 일에 익숙했던 그녀는, 사랑을 받는 일에는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심지어 누군가가 그녀를 도우려 하거나, 진심으로 걱정해줄 때조차 그녀는 본능처럼 괜찮다고 말하고, 혼자 괜찮아질 수 있다고 말하며 물러섰다. 받아본 경험이 없기에, 받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의심했고, 당당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무섭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평생 그런 감정을 '감추는 법'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주는 사람으로 살면서도 계속해서 마음속에 이런 목소리를 남기게 되었다. “나는 언제쯤 진짜 사랑받을 수 있을까?” 사랑을 많이 주는 사람은, 사랑이 넘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너무 커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애쓰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자신을 소홀히 해가면서까지 아이들에게 헌신한 이유는, 단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그녀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고, 자신 안의 어린 아이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길 바라는 간절함’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말하지 못한 문장을 가슴속에 안고 살았다. “나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이 아이만큼은... 이 아이만큼은 꼭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 마음이 깊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자신에게는 점점 더 무관심해졌다. 감정이 힘들어도 참고, 몸이 아파도 넘어가고, 지쳐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살아가던 어느 날, 그녀는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랑을 준다 해도, 정작 내 안의 어린 아이는 여전히 외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그녀는 처음으로 멈추어 서서, 마음속에 이렇게 되물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주고 있는 걸까? 나는 왜, 나 자신에게는 이렇게 인색할까?” 그 질문 앞에서 그녀는 울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이제야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신호였다. 사랑은 주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진짜 사랑은, 주는 만큼 나에게도 흘러들어올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나를 이해하는 법
그녀는 종종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처럼 살아왔다'고 표현하곤 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내뱉었던 말이었지만, 돌아보면 그 말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언제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사랑받는 일보다는 참는 쪽을 선택했고, 갈등이 생기면 먼저 사과하고 물러났으며, 자신의 감정을 꾹 눌러서 상대방이 편하게 느끼도록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종종 상처받았고, 혼자 아파하면서도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사랑을 원했지만, 그 사랑 앞에서 늘 움츠러들었고, 결국은 혼자 감당하는 관계 속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삶을 한 발 물러나 바라보았을 때, 스스로가 늘 ‘희생하는 여자’ 혹은 ‘이해해주는 사람’이라는 역할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자 남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사랑은 나를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각본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살아온 셈이었다. 그 각본은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따라 쓰게 된 무의식의 시나리오였다. 어린 시절, 감정은 드러내면 혼나거나 무시당했고, 원하는 것을 말하면 ‘왜 너만 그러니’라는 말을 들었기에, 결국 침묵하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을 쉽게 털어놓지 못했고, 상대가 바쁘거나 예민해지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속은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감추는 것이 사랑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너무 오랫동안 익숙했고, 때로는 자랑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나는 문제를 키우지 않아”, “나는 너를 위해 항상 양보할 수 있어”라는 말들은 얼핏 보면 성숙하고 이해심 깊은 사람의 말 같지만, 그 이면에는 늘 외롭고, 두렵고, 사랑받고 싶었던 한 아이의 마음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감정의 무대에서 지워가며, 상대의 기분에 맞춰 대사를 조율하는 조연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대가 끝난 뒤, 아무도 없는 객석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삶은 어느 날,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 듯했다. “당신은 왜 늘 그렇게 살아왔나요? 언제부터, 왜, 그렇게까지 참고 견뎠나요?” 그 질문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이유는 너무 많았지만, 그 모든 이유보다 더 크고 오래된 건, 바로 ‘그게 나라고 믿어버린 습관’이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그렇게 규정해버린 것이다. 참는 사람, 다 주는 사람, 다 이해해주는 사람. 하지만 이제는 그 역할에서 천천히 내려올 때가 되었다는 것을, 그녀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비극의 주인공은 끝내 사랑을 받지 못하고 퇴장하지만, 삶은 반드시 그렇게 끝나야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진짜 변화는, 자신이 만들어온 각본을 시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다. 그 각본이 정말 ‘나의 이야기’였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대와 요구에 의해 쓰여진 대본이었는지를 구분하는 일. 그녀는 조금씩 그런 연습을 해나가고 있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사과부터 하기 전에 잠시 멈춰보는 것, 억울한 마음이 올라올 때 무시하지 않고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나도 그 상황에서 아팠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보는 것. 그것은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존중하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였고, 비극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단단한 발걸음이었다. 그녀는 이제 안다. 사랑은 이해하고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감정을 드러내고, 요구하고, 나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로서 존재하는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려면, 먼저 내가 나를 믿어주어야 하고, 내가 나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천천히, 비극의 주인공 자리에서 내려와 무대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다. 조연이 아닌, 조심스러운 주인공으로.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살기 위해서.
내 마음의 보호자 되기: 나를 안아주는 연습
그녀는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세상을 향해 좋은 사람으로 살아오느라,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괜찮아’라고 말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아플 때도 참았고, 억울할 때도 스스로를 다그쳤으며, 슬플 때조차 ‘그럴 수도 있지’라며 눈물을 미뤄둔 채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늘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고려하느라, 자신의 감정은 번번이 뒤로 밀렸고,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선 무언가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것이 단순한 외로움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게 무심했다는 상실감이었다. 그녀는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 감정부터 인정해보는 것’에서 출발했다.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난 대로 있는 그대로 그 마음을 마주하고,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연습. 처음엔 어색했고,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다그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이런 걸로 왜 울어?”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 목소리와도 싸우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그 말들마저 안아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자신이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배워온 방식이었으니까. 이제는 그마저도 보듬어주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다음으로는, 자신의 욕구를 느끼는 연습을 했다. 늘 누군가의 필요에 맞춰 살았기에, 정작 ‘나는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앞에서 멍해질 때가 많았다. 배가 고픈지도 모르고 일했고, 피곤한지도 모르고 움직였고, 속상한 감정이 올라올 때조차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라며 눌러왔던 자신을 다시 불러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에 한 번,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마음속에 올라오는 감정을 글로 써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내면의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오늘 어땠어?", "지금 뭐가 제일 힘들어?", "무엇을 원해?" 그렇게 작은 질문을 던지며, 오랫동안 침묵 속에 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시간이 그녀에겐 작지만 깊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 연습은 단순히 감정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점점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보살펴야 할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언제나 ‘견뎌야 하는 사람’, ‘괜찮아야 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이 사람도 힘들었겠구나', '이 마음도 알아줘야겠구나' 하는 인식으로 바뀌어 갔다. 그전까지는 아이나 배우자, 가족을 챙기는 일이 가장 우선이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도 챙겨야 할 대상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변화는 작지만 결정적이었다. 더 이상 그녀는 세상의 보호자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보호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만해도 괜찮아”, “너무 애썼어”, “지금은 쉬어도 돼”, “너는 정말 잘해왔어”라는 말을, 누군가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기 스스로 해주는 연습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마음에 닿지 않던 말들이 어느 날은 눈물로 터져 나오기도 했고, 한없이 어색하던 그 다정한 말투는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잊고 있던 엄마 품을 찾아가는 아이의 걸음처럼 느리지만 따뜻한 여정이었다. 그녀는 알게 되었다. 상처는 누구나 있지만, 상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처를 다독이는 첫 번째 손길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지금 그녀는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딸이며, 누군가의 친구이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 안의 오래된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었다. 그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고, 억울한 마음을 억지로 삼키지 않아도 되었다. 누군가의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감정을 지키면서 관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과 연습이 만든 변화였다. 그녀는 더 이상 삶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에 둔 사람으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제 그녀가 진심으로 이 말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편이 되어도 되는 사람이다.”
“이제는 내가 나를 안아줄 차례다.”
사랑을 되돌리는 용기 – 나에게로 향하는 길
그녀는 오랫동안 사랑을 주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감정을 맞춰주며, 무엇이든 도와주려 애쓰는 삶을 살아왔다. 상대방이 편해지면 자신도 괜찮아지는 줄 알았고, 내 마음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어루만져야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줄 때마다 안도했고,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겼으며, 그렇게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괜찮은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살아왔던 시간들은 점점 그녀를 지치게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랑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 공허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오랜 시간 이해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가족은 무탈했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랐으며,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성숙한 사람이라 불렀다. 하지만 밤이 되면, 하루를 다 써버린 몸과 마음이 소파에 주저앉아 텅 빈 듯한 느낌으로 가득 찼고, 때로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문득 눈물이 차올랐다. 그것은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고, 누가 그녀를 무시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서러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 속에는 아주 오래된 문장이 숨어 있었다. “나는 왜 늘 혼자야?”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있는 사람은, 더 깊은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그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타인을 위한 헌신은 때로는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자신을 잊게 만드는 연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진짜 용기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드는 것,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 ‘나도 이만큼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회복을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씩 사랑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주던 관심을 자신에게도 조금 나누고, 가족을 돌보는 마음만큼 자기 마음도 살피고, 타인의 말보다 자신의 직감을 믿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하고 이기적으로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점점 내면의 안정을 되찾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었고,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게 되었으며, 혼자 있는 시간이 오히려 회복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는 그것을 ‘돌아온 사랑’이라 불렀다. 오랜 시간 밖으로만 흘러나가던 사랑이, 이제는 자신에게도 흘러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은 원래 양방향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단방향으로만 살아왔다. 준 만큼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고,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도 그것이 성숙함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안다. 사랑은 나를 잃는 일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타인을 돌보며 살아왔던 시간은 분명 가치 있었지만, 이제는 그 돌봄이 자신에게도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지금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 사랑 안에 나도 있어요.” 그 말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그녀의 삶 전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제 그녀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잃지 않는다. 사랑을 하면서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감정을 나누되 자신을 잃지 않는 방식을 배워가고 있다. 그것은 사랑을 되돌릴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오랜 시간 멀어져 있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너에게 돌아갈 차례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게.”
결론 – 이 사랑은 나에게도 돌아와야 하니까
그녀는 살아오며 수많은 사랑을 줬다. 그 사랑은 말보다 행동이었고, 기다림이었고, 희생이었으며, 때로는 침묵 속에 흐르는 눈물 같은 것이었다. 사랑이란 결국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 믿었기에, 자신보다 늘 타인을 앞세웠고, 나보다는 우리, 기쁨보다는 참음을 택해가며 관계를 지켜냈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따뜻한 사람이라 말했고, 성숙한 사람이라 불렀지만, 그 따뜻함과 성숙함의 이면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깊은 외로움이 있었다. 사랑을 주면서도 허기졌던 마음, 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던 감정, 혼자서 조용히 지켜보던 그 마음이, 사실은 그녀가 스스로에게 가장 원하던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랑은 애초에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의 인정을 원했지만 받지 못했고,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용납되지 않았던 기억은, 어느새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그녀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오랜 시간 누군가를 돌보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정작 자신을 안아주는 법은 잊고 살았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돌고 돌아 본질을 향해 걷게 한다. 그녀는 마침내 멈춰 섰고,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마주했다.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 질문은 그녀를 부드럽게, 그러나 깊이 있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누군가의 엄마이기 전에, 누군가의 딸이기 전에, 그녀는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실을 다시 마주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사랑은 누군가에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에게도 흘러와야만 그 의미를 완성한다는 것을. 진짜 사랑은 자신을 비워가며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채우며 나누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자신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나도 괜찮아야 한다고. 나도 쉬어야 하고, 나도 따뜻한 말이 필요하고,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고. 그리고 그 누군가가 되어줄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이유는 누군가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마침내 자기 자신과 다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온전한 중심이 되었고, 삶을 더욱 평화롭게 만드는 단단한 바닥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사랑을 받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안아줄 줄 알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할 수 있으며, 무언가를 참기보다 나를 지키는 방향으로 선택할 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강함이 아니라, 나에게 진심으로 따뜻해지는 용기에서 비롯된 삶의 전환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전환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나도 사랑받겠지”라고 기다리는 대신, 이제는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에게 말해준다. “그래, 이제는 나를 사랑할 차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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