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 《붓끝에 담긴 마음공부 – 성하림과 몽우조셉킴의 예술세계》

ohom 2025. 4. 17. 16:37

몽우, 일체유심조

예술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그림 속에서 만납니다.
그림은 설명하지 않고도, 어루만지지 않고도, 어느 날 불쑥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묵은 감정들이 흐르듯 흘러가는 것을 느낍니다.

성하림 화백의 그림이 그렇습니다.
따스한 색감과 유연한 곡선, 무의식의 감정을 담은 화면은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결'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그의 추상화는 때론 말이 없고, 구체적인 형상도 없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을 깨끗하게 비워주고 다시 채워줍니다.

그리고 몽우 조셉킴 화백의 작품을 보면,
우리는 사유의 깊은 우물 앞에 선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그림은 철학 그 자체입니다.
붓 하나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세계를 담아,
마음이 곧 세상이며, 마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통찰을 전합니다.

이 두 화백의 작품을 마주하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어디서 온 걸까?
그림은 그저 그려진 것일 뿐인데,
왜 나는 이 그림 앞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예술은, 그래서 마음공부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이 글은, 그 예술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여정입니다.

1. 🎨 색으로 마음을 치유하다 – 성하림 화백의 감성 추상화 

성하림화백

성하림 화백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그 색감에 먼저 마음을 빼앗겼다.
찬란하거나 요란하지 않은, 부드럽고 따스한 색들이 마치 오래된 감정을 닮은 듯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림이라는 시각 예술이 이렇게 촉각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구나—그의 작품 앞에서는 ‘보다’라는 말보다 ‘느끼다’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성하림 화백의 추상화는 단지 형상을 벗어난 작업이 아니라, 감정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여정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연의 빛, 바람, 구름, 풀잎 같은 것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고도, 그것들의 감촉과 기억을 화면 위에 되살려낸다.
그림 속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결’이 조용히 살아 숨 쉰다. 그의 그림은 자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 머물게 된다. 하루의 끝, 조용한 음악을 틀고 그 앞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호흡이 느려지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온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이며, 내 안의 감정이 조용히 움직이는 순간이다. 오래 바라보다 보면, 처음엔 보이지 않던 색의 흔들림이나 붓끝의 여백이 눈에 들어온다. 겹겹이 쌓인 색의 층과 결은 사람의 마음처럼 복잡하고도 섬세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조용하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이 많아진다. 특히 성하림 화백의 색은 상처를 조용히 감싸주는 느낌을 준다.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림 속 색의 결이 오래된 결핍을 감싸 안아주는 감각이 있다. 바로 이것이 예술의 힘 아닐까. 설명하거나 위로하지 않아도, 그냥 곁에 있어주는 존재.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색은 결국 마음이에요. 내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그대로 붓끝에 담깁니다.”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우리가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를 때,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듯— 그의 그림도 ‘보여지는 마음’ 그 자체였다.

갤러리 다연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한 한 관람객은 이렇게 적었다.
“그림 속에서 내 마음이 보였어요. 요즘 참 지쳐 있었는데, 그림 속 색을 보며 그냥 울컥했어요.
누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아준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성하림 화백의 그림은 그림 이상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고, 잊고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는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그의 그림을 보고 나면,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내 안에도 저런 색들이 숨어 있었구나. 나에게도 여전히 따뜻한 빛이 남아 있었구나.
그걸 느끼는 순간,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2. 🖋 선을 따라 깨달음에 이르다 – 몽우 조셉킴 화백의 철학 예술

일체유심조

몽우 조셉킴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치 한 권의 철학서를 마주한 것 같았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조형 언어를 넘어서, 선 하나하나에 깊은 사유와 통찰이 스며 있다. 붓끝에서 시작된 단순한 선은 화면 위를 유유히 흐르며, 마음속 어떤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다. 그것은 단순히 ‘예쁜 선’이 아니다. 몽우 화백의 선은 질문을 던지고, 멈추게 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의 대표 철학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는 이 고전적 문장을, 그는 현대적 추상 회화로 재해석한다. 어쩌면 그의 그림은 일종의 ‘마음의 지도’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형상이나 색채를 덜어내고 남은 것은 오직 마음의 움직임, 그 흔적이다. 그는 삶과 자연, 인간과 우주의 이치를 ‘마음’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꿰어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일은, 곧 내 안의 마음을 관찰하는 일이 된다.

몽우 화백의 작품은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차분하고 묵직한 기운으로, 오히려 더 강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어느 날, 회색빛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 앞에 서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복잡한 것이 없는데도 내 마음은 그 선을 따라 계속해서 움직였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도착하지 않는 듯한 선, 마치 수행자가 끝없이 반복하는 마음의 관문처럼. 몽우 화백은 바로 그 ‘과정’에 집중한다. 그림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있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그의 선은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마음이 곧 세계입니다. 당신의 그림도, 당신의 현실도, 결국은 당신의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이런 철학적 언어는 언뜻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림을 통해 만나면 다르다. 설명 없이도 그림은 그 철학을 전한다. 그의 선을 따라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자신에 대한 통찰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나는 진정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림 속 선은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멈추기도 하고, 갑자기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직선처럼 뻗어 나가지도, 한눈에 명확하게 그려지지도 않는 우리네 삶처럼. 우리는 종종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낙심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몽우 화백의 선은 그 모든 ‘흐름’을 존중한다. 멈춤조차도 하나의 완성이고, 흔들림마저도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묵묵히 ‘괜찮다’고 말해준다. 지금의 당신도, 그 길 위에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한 관람객이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 선이 자꾸 나를 따라오네요.” 단순한 감상처럼 들렸지만, 나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림이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나는 그 선을 따라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토록 누군가의 말이 아닌, 스스로의 마음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몽우 화백의 그림은 그 연습을 조용히 도와준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복잡하지 않지만 어렵다. 그의 그림은 한 번 보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볼수록,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이 조금씩 열릴수록, 같은 그림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것이 몽우 조셉킴 화백의 예술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선 하나로도 깊은 감정과 철학을 건네는 그의 세계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3. 🌼 예술이 마음공부가 되는 순간들 

사람들은 보통 마음공부를 명상이나 철학서 속에서 찾으려 한다.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호흡을 바라보거나, 지혜로운 문장을 곱씹으며 삶의 해답을 구한다. 그런데 때로는, 그 어떤 수행보다 강하게 마음을 흔드는 순간이 있다. 바로 '작품 앞에 홀로 서 있을 때'다. 말이 없고 움직임도 없는 그림 앞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감정과 생각이 솟아오른다. 그 감정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성하림 화백의 그림을 보면, 그 따뜻한 색감 속에 숨겨진 마음의 잔상이 하나둘 떠오른다. 무엇을 그린 것이 아니라, 무엇을 느끼게 하는 그림. 그래서 그의 추상화는 마음을 여는 문처럼 느껴진다. 붓끝으로 직조된 색과 선이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의식의 장벽을 넘어 무의식의 세계로 이끌린다. 마음속 깊은 곳, 말로 하지 못한 상처와 바람, 두려움과 소망이 조용히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은 일종의 마음의 고백이자 해방이다. 내가 나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감정들이 그림을 통해 비로소 말문을 트는 것이다. 몽우 조셉킴 화백의 작품은 또 다른 방식으로 마음공부를 이끈다. 그의 선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닿는 것’에 가깝다. 마음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붓을 따라 흐르고, 보는 이 또한 그 흐름 속에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얹게 된다. 선은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속엔 삶의 질문과 대답이 함께 있다.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선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에 닿는다. 그 깨달음은 거창하지 않다. 그냥 ‘아, 이래도 괜찮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그 자체다. 두 화백의 작품을 마주하다 보면 한 가지 공통된 느낌이 있다. 그것은 '해석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림을 볼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이들의 그림 앞에서는 오히려 해석을 내려놓게 된다. 이해가 아닌 느낌으로 다가오는 예술. 말보다 감각이 먼저 반응하고, 논리보다 감정이 먼저 움직인다. 그 순간, 우리는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느끼는 나’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곧 마음공부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자신을 너무 분석하려 하거나, 스스로를 판단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진짜 마음공부는 판단이 아니라 관찰이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에 갇혀 있는지, 왜 그 장면 앞에서 멈추었는지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다. 성하림 화백의 그림은 그런 관찰을 가능하게 한다. 몽우 조셉킴 화백의 그림은 그런 관찰 속에서 받아들이는 힘을 길러준다. 예술이 마음공부가 되는 순간은, 사실 아주 사소한 순간이다. 그림을 보다 문득 눈물이 고일 때, 이유 없이 따뜻함이 느껴질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위로받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 순간, 내면과 마주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기적이자, 마음의 성장이다. 누구나 치유를 원하지만, 그 치유는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좋은 작품은 그 치유의 방향을 조용히 가리킨다. 나의 안쪽으로, 나의 깊은 곳으로. 그래서 성하림과 몽우의 작품은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교과서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색으로 살고 있나요?”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울컥하게 된다. 그것은 누군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는 감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오직 예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갤러리 다연에 작품을 보러 온 한 사람은 이런 후기를 남겼다. “이곳은 조용한 상담실 같아요. 누가 내 얘길 들어준 것도 아닌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그 말이 이 글의 의미를 잘 대변해준다. 예술은 대화를 하지 않지만, 가장 깊은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 대화는 결국 나 자신과의 대화다. 그림 앞에서 마음이 움직였다면, 당신은 이미 그 순간, 마음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4. 🪞 그림 앞에서 나를 만나다 – 감상의 내면화

우리는 그림을 보기 위해 전시장에 가지만, 때로는 그림을 통해 오히려 ‘나’를 보게 된다.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단순한 색의 조합, 선의 흐름, 공간의 여백 속에서 문득 멈춰 서게 되는 순간.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장면 앞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그 그림이 당신 안의 무언가와 조용히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상이란, 결국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일이며, 느끼는 일은 곧 나를 마주하는 일이다.

성하림 화백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내가 언제 이렇게 지쳐 있었나’를 깨닫게 된다. 바쁘게만 살아온 일상 속에서 누적된 피로와 감정의 덩어리들이 부드러운 색의 층 사이에서 서서히 풀어지고, 그 사이로 잊고 있었던 나의 감정들이 얼굴을 내민다. 감상은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이 장면 앞에서 왜 울컥하는가. 그 질문은 설명보다 먼저 다가오며, 내면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몽우 조셉킴 화백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 선 하나가 나의 사고방식을 자극하는 걸 느낀다. 단순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을 따라가며 나는 나의 ‘관념’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선은 왜 이 방향으로 흘렀을까, 왜 여기서 멈췄을까, 왜 이토록 단순한 형상이 이토록 많은 감정을 끌어내는 걸까. 그 물음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향한다. 나는 지금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가. 나는 멈춰야 할 지점에서 계속 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이처럼 감상의 내면화란, 그림을 매개로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일’이다. 미술 작품은 해답을 주지 않지만, 우리가 질문을 시작하도록 도와준다. 그 질문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느끼도록 한다. 이 장면 앞에서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괜찮아요,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그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런 감각이 자주 다녀간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처음 찾아온 이들에게는 조금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그 낯섦이야말로 감상이 시작되는 진짜 순간이다.

그림을 통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처음이라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조용히 오래 머무는 것이다. 성하림 화백의 색채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내가 언제부터 이토록 무채색으로 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몽우 화백의 선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덧 나의 마음도 함께 흐르며 ‘잡고 있던 것’을 놓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다.

갤러리 다연에서의 그림 감상 시간은 바로 그런 시간을 만들어준다. 이 공간은 상주 전시장이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사람들을 위해 넓은 음식점 공간을 빌려 조용한 예술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햇살이 들어오는 오전, 차와 간식이 함께 놓이고, 미술사가의 부드러운 해설이 공간을 채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특별한 건, 그 시간 안에 ‘침묵’이 있다는 것이다. 꼭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감정이 올라와도 괜찮다. 감상이란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작품 설명이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그림 앞에 더 머문다.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노트에 짧은 감상을 적고, 누군가는 오래 그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어떤 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그 모든 모습이 자연스럽다. 감상은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저,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마음의 연습이다. 이런 감상의 시간이 반복되면, 삶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가던 장면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고, 예전에는 외면하던 감정에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가게 된다. 그림 한 점을 통해 시작된 감정의 흐름이, 결국 내 삶 전체의 리듬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 주는 가장 조용하지만 강력한 변화다.

5. ☕ 갤러리 다연에서의 조용한 치유 – 작품 감상과 미술사의 해설 

한 달에 단 하루, 오전의 햇살이 비추는 넓은 공간 속에 작은 미술관이 열린다. 상주 갤러리가 아닌 음식점의 문이 열리고, 벽면 가득 조용히 작품들이 걸린다.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그림 위에 가볍게 머무르고, 차분한 클래식 음악이 배경처럼 흐른다. 테이블 위에는 정성스레 준비된 따뜻한 차와 간식이 놓이고, 그 옆에는 오늘의 작품 설명을 맡은 미술사가 오정엽 선생님이 조용히 앉아 있다. 이름하여 ‘갤러리 다연의 그림 감상 모임’—하지만 그건 단지 ‘전시’ 이상의 어떤 시간이다. 그곳엔 마음을 내려놓는 쉼이 있고, 말을 건네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감정의 교류가 있다.

갤러리 다연에서 진행되는 이 그림 감상 모임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귀한 순간을 제공한다. 누구나 참석할 수 있고, 그림에 대해 잘 몰라도 괜찮다. 이곳에서 중요한 건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미술사는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작가의 세계와 철학을 차분히 풀어내며, 관람객들이 작품과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설명은 어렵지 않고, 오히려 생활 속 언어에 가깝다. “이 색이 여러분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나요?”, “혹시 이 선을 따라가며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라는 질문은 감상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든다. 어느 순간, 그림을 보는 일이 아니라 ‘나를 보는 일’로 감상의 중심이 옮겨간다. 그림을 보며 스스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이 시간은, 단지 예술의 체험을 넘어 마음의 휴식으로 이어진다. 참여자들 중에는 처음엔 그저 가벼운 관심으로 오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깊이 몰입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하림 화백의 부드러운 색감 앞에서 한참을 머무는 사람, 몽우 조셉킴 화백의 철학적 선을 따라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사람, 설명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지금 이 공간에 흐르는 분위기는 ‘공감’과 ‘치유’라는 걸. 무엇보다 이 모임이 특별한 건, 그 누구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림을 잘 안다고 뽐낼 필요도, 감상을 멋지게 표현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미술사가 건네는 말들도 늘 겸손하고 따뜻하다. “그림은 정답이 없어요. 여러분이 느낀 게, 그게 바로 답입니다.” 이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긴장을 내려놓는다. 삶에서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익숙한 이들에게, 이곳은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된다.
그림 앞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공간, 그것이 바로 갤러리 다연이다.

그림을 보는 동안 준비된 차 한 잔이 마음을 더 느긋하게 만들어준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을 수 있는 작은 디테일—빛의 흐름, 색의 농담, 붓질의 결까지—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그때마다 마음속 감정의 조각들이 반응한다. 간식 하나를 천천히 먹으면서, 나는 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감상은 단지 시각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 전체를 통해 마음을 다듬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이 모임이 누군가에겐 한 달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마음, 사람 사이에서 상처받은 감정, 스스로를 잊고 살았던 순간들을 이 시간 속에서 조용히 꺼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단지 예술을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회복하는 작은 쉼터가 된다. 차분한 설명과 다정한 공기, 서로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는 편안함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치유’를 경험한다.

갤러리 다연은 그렇게 예술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고 있다. 그림은 무대 위 주인공처럼 걸려 있지만, 그 앞에 선 사람 역시 그날의 주인공이 된다.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왔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이 공간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준다. 위로하려 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설명하려 하지 않지만, 어쩐지 모든 것이 이해된다. 바로 그 조용한 이해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마음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마음이 머무는 그림,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삶이란 매일같이 앞만 보고 걷는 여정 같지만,
가끔은 멈추어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그림 앞에 서 있는 순간이 바로 그렇다.
그 무엇도 하지 않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조용히 한 점의 그림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깊은 나를 만나게 된다.

성하림 화백의 그림이 말해주는 건 ‘괜찮아도 괜찮아’라는 위로다.
부드럽고 따뜻한 색의 결이, 말보다 선한 힘으로 감정을 어루만진다.
몽우 조셉킴 화백의 선은 ‘지금 이 마음이 곧 삶의 전부’임을 일깨운다.
한 줄의 붓질로 시작된 마음의 여행은
우리를 성찰로 이끌고, 그 길 끝에서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색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갤러리 다연의 그림 감상 시간은 단지 예술을 향유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건 결국, 예술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예술이 위대한 이유는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림은 어떤 때는 거울이 되고, 어떤 때는 창이 되어
우리에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한 달에 한 번, 익숙한 공간이 낯설고 특별한 장소로 바뀌고
익숙한 마음도 그 속에서 조용히 새로워진다.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들어섰던 사람들이,
마지막엔 조용한 미소를 안고 돌아간다. 그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품고 갔을 감정들—
그건 위로였고, 공감이었고, 때로는 아주 작지만 선명한 '변화'였다.

살다 보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어려운 날이 있다.
그럴 때, 그림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다. 괜찮다고,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어느새 조금 더 다정한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림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아본 적이 있는가?

그 짧은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지나가는지,
그 순간의 정적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한 번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예술은 결국, ‘내 마음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조용하고 진실한 언어다.

갤러리 다연이 만들어가는 이 한 달에 한 번의 시간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림을 보러 온 줄 알았는데, 결국은 나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
그 길 위에서 당신도, 당신만의 빛깔을 찾게 되길 바란다.